- 베이비 드라이버 (Baby Driver, 2017)
※ 이 글에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영화의 전반적 내용이 기술되어있습니다.
요즘 자라나는 친구들은 mp3라는 개념을 알까? 내 손안의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엄청난 보급률로 요즘은 mp3라는 저장매체보다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더욱 친숙하다. 하지만 필자의 중 고등학교 시절은 언제나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mp3로 본인이 직접 트랙리스트를 담아와 각자의 음악적 고양을 서로 경쟁하는 낭만이 있었다.(물론 그 당시 음원들은 모두 불법이었지만...) 그 당시 조금 멋을 아는 친구들이 선택하는 mp3는 바로 애플사의 아이팟 시리즈였다. 그때 나 지금이나 애플사의 '혁신적인' 디자인은 비싼 값을 치루더라도 들고 다닐만한 패션 아이템이었다. 여기 이 철 지난 고철 덩어리를 다시금 사용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필자의 최애 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에드가 라이트의 신작 [베이비 드라이버]다.
좀비 장르를 뒤틀었던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시골이라는 이질적인 배경에서의 화끈한 버디 액션물 [뜨거운 녀석들], 황당한 외계인의 지구 침공 sf [지구가 끝장 나는 날]까지 “피의 아이스크림 3부작”을 완성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전부 성실함과 건설적인 면모라고는 볼 수 없는 루저면서 그 상황에서 절망적인 문제까지 떠안은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항상 간결한 줄거리 라인을 보인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루저들의 좀비들로부터의 생존기, [뜨거운 녀석들]는 기이한 시골 마을 속 열혈 형사의 수사기, [지구가 끝장 나는 날] 알코올 중독자의 지구 구하기, 이렇게 영화에 별 내용이 없다는 것은 그가 영화를 채워야 하는 요소들이 스토리라인 외에 많아짐을 의미한다.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는 한 편의 큰 그릇에 많은 부분을 채워야 하는 '내용'의 칼로리가 적다. 여기서 에드가 라이트의 진가가 나온다. 그는 그릇의 빈 부분들을 위트와 풍자, 해학 그리고 감각적인 연출로 커버한다.
흔히 우리는 잘 만들어진 영화를 ‘감각적이다’라 표현하고는 한다. 두루뭉술한 이 표현이 제시하는 감각적인 영화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이 표현이 와 닿지 않는다면 CF나 뮤직비디오를 생각해 보자. 뮤직비디오는 고작 5분 남짓에 그 노래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고 CF는 그것보다 훨씬 적은 40초대의 길이로 상품의 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위의 두 장르는 굉장히 시각적인 것에 더욱 치중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잘 만들어진 광고나 뮤직비디오를 보고 감각적이라고 느끼곤 한다.
영화 역시 완벽한 시각적 예술 영역이다. 소설 따위의 텍스트 매체가 전해주지 못하는 쾌감을 커다란 스크린에서 즐기는 것이야말로 상업 영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감독이란 얼마나 이야기와 감정 등 사소한 것까지 이미지로 구현해 낼 수 있느냐에서 역량이 나오는 것이다.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역시 이러한 감각적인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면, 극 초반 베이비는 양아버지와 함께 tv를 보는 장면의 경우 쉴 새 없이 바뀌는 채널 속 장면들이 모두 뒤에 벌어질 일들을 복선처럼 알려준다. 뒤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어떠한 상황을 씬으로 만들거나 대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에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채널에선 영화 [꾸러기 클럽] 속 꼬마가 조 카커의 ‘you are so beautiful’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다음으로는 [사랑은 너무 복잡해]의 대사 “애들이 참 빨리 자라죠?”, [몬스터 주식회사] “우리 서로 한 팀이잖아요.”가 나온다. [파이트 클럽]에서는 “그래서 잘 된 거 있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우에 대한 다큐가 나온다. 이후 영화는 베이비가 레스토랑에서 데보라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되고(you are so beautiful) 범죄 무리 속 끌려다니는 것(baby)에서 벗어나(성장-애들이 참 빨리 자라죠?) 데보라와 떠날 준비(우리 서로 한 팀이잖아요.)를 한다. 하지만 일이 베이비의 뜻대로 풀리지 않고(그래서 잘 된 거 있소?), 달링을 잃고 분노한 버디와 끈질긴 싸움을 벌인다(투우). 영화의 전체 줄거리를 단 2분 내외 만에 시각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게다가 위의 영화 속 대사들은 실제로 베이비가 극 중에서도 사용한다. 에드가 라이트의 감각적이면서 위트까지 겸비한 센스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에드가의 기존의 작품들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성향을 가진다. 그의 최초의 미국에서 찍은 영화인 것과 사이먼 페그의 부재 등과 같은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작품이 지향하는 부분도 많이 달라졌다. 3부작 속 현실 루저들을 내세우며 풍자와 해학을 코미디 전면에 세운 것과 다르게 이 영화는 영국산 위트가 가미된 할리우드식 자동차 액션 영화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장기를 버리고 빈 부분을 채울 묘수로 '음악'을 차용했다. 그러나 올드팝과 위트, 스타일리시한 장면들로 범벅된 영화들은 이젠 진부하기까지 하다. 올드팝과 절묘한 액션의 조합은 이미 [킹스맨]에서, 올드팝과 위트 있는 장면 연출은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 임팩트가 밀리는 느낌을 준다.(앞의 두 작품은 특정 장면에 악센트를 준 느낌이라면 [베이비 드라이버]는 온통 그런 장면들로 가득하니 딱히 임팩트가 없게 느껴진다.) 레트로한 느낌을 더한 카세트테이프를 내세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탓일까 심지어 아이팟조차 아직 이른 느낌을 전해준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실제로 [베이비 드라이버]는 자동차 액션 장면들을 제외한 이야기들의 연결 장면 대부분에서 '음악'을 잘 활용한다. 특히 극 초반부 베이비의 커피를 사러 가는 롱테이크 장면은 좋은 음악과 베이비의 성격, 재치 있는 가사 삽입까지, 앞선 오프닝 카체이싱 장면으로 오른 텐션을 잡아준다. 마치 베이비가 운전하고 있는 차에 탑승한 것처럼 영화는 내내 자동차 액션과 위트가 음악과 함께 스피드 있게 몰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