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놈] 리뷰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화 개봉 전부터 주연 배우 톰 하디의 인터뷰에서 시작된 불안한 조짐이 미국 언론 내 비평들까지 더해져 소니의 [베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R등급을 목표로 베놈을 아주 고어하게 묘사할 거란 소문과는 다르게 PG-13등급으로 개봉하며 많은 영화팬과 스파이더맨 덕후들의 소니에 대한 볼멘소리가 들려왔지만, 영화의 실상을 마주한 지금 베놈의 대한 잔혹한 묘사를 담은 R등급으로 제작되었다 한들 이 작품이 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지는 의문이다.
(R, PG-13는 미국 내 영화를 관람하는 나이 제한에 대한 등급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R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 PG-13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이다.)
영화 [베놈]은 유독 역광에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빛을 화면에 담아내는 연출이 특이했다. 영화에서 에디 브록(톰 하디)이 라이프 파운데이션에서 심비오트에게 감염되며 그들로부터 도주하는 장면에서는 숲에서 그를 쫓는 일당이 쏘는 라이트와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면에 담긴다. 이는 쫓기고 있는 에디 브록의 긴박함을 관객에게 동일하게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빛’이라는 매개체가 무언가를 쫓고, 감시하는 눈(시선)의 느낌으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심비오트에 집착하며, 이것을 가지고 인류의 큰 재앙인 질병을 이겨내려는 연구를 하는 드레이크가 등장할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진다. 라이프 파운데이션에서 피 실험체인 노숙자들에게 강제로 심비오트를 주입할 때 역시 빛을 역광처럼 화면의 중앙에 배치한다. 이는 드레이크가 심비오트에게서 갖는 시각이, 인류가 가진 역경을 해쳐나갈 수 있는 희망(빛)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영화 [베놈]은 이렇듯 빛을 담아내며 실제로 ‘베놈’이 가지는 안티히어로적인 이중성을 연출로 표현해냈지만, 무슨 일인지 중반을 넘어가며 이러한 맥이 끊기는 느낌이다. 이것은 단지 빛을 담아낸 연출의 한 부분을 예로 든 것이지만, 영화는 상당 부분 칼질(제작사의 월권)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톰 하디의 인터뷰에서 촬영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무엇이냐는 인터뷰 질문에 30분 분량 가량의 블랙코미디적인 부분이 가장 좋았지만 삭제되었음을 언급했는데, 이 부분은 아마 에디 브록과 베놈이 서로를 알아가며 서로에게 동화되는 과정으로 추측된다. 결국 이 영화는 작품 자체로서 완벽한 편집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베놈은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완결작인 [스파이더맨3]에서 이미 실사화 된 적이 있다. 그 작품과 이번 [베놈]을 같이 놓고 보면 심비오트를 묘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스파이더맨3]에서는 심비오트가 굉장히 실제적인 고무 느낌이 강하게 표현된 반면, 이번 작품에서는 수분기 가득한 생명체 느낌을 강조했다. 그 탓인지 2007년에 만들어진 심비오트와 베놈이 2018년에 만들어진 것들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거기다 외계 생명체라는 ‘이질감’에 있어서도, 한 번 달라붙으면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기생체 느낌에도 2007년 작의 고무 느낌이 탁월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이 너무도 낡은 창작에 대한 조언을 이 영화를 보고 다시 꺼낼 줄 상상도 못 하였다. 범람하는 히어로 장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공한 히어로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 명작들을 레퍼런스 했는지는 일일이 따지기 입 아플 정도이다. 예전만 하더라도 히어로 영화는 슬래셔 무비와 하이틴 공포물과 같이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어졌다. 평범하지만 나쁘진 않게 살아가던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만나 좌절하게 되지만 우연한 기회에 특별한 힘을 얻게 되고, 그 힘을 악용하려는 세력에 도망치다 결국에는 자신이 얻은 특별한 힘의 무게를 깨닫고 맞서는 것이 흔한 이야기 골자였다. 그렇지만 히어로 무비가 장성하여 영화 산업의 메인 스트림에 앉게 되자, 수많은 변주와 변형을 이루어냈다. 영화 [시빌워]의 후반부에서 토니 스타크가 진실을 깨닫고 폭주하는 장면은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세븐]을 레퍼런스 한 것으로 유명하고, 영화 [로건]은 [셰인], [용서받지 못한 자] 등 서부 로드극을 많이 참조했다.
영화 [베놈]은 그렇지만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위에서 정의한 고전적인 히어로 무비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베놈]도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상에서 주야장천 언급되는 ‘기생물’이라는 키워드는 공포영화의 한 장르로서 많은 이름 난 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영화 [인베이젼], [에스트로넛]부터 만화 [기생수]까지, 레퍼런스 할 수 있는 많은 작품들과 [베놈]만이 가진 ‘기생’이라는 키워드가 만들 수 있는 공포 서스펜스가 안타깝게도 전혀 쓰이지 않았다. 특히 [베놈]에서 심비오트들의 리더 격인 ‘라이엇’이 여러 숙주들을 바꿔가며 미국으로 넘어오는 장면이 있다. 말레이시아 경찰부터 시장 상인, 소녀를 옮겨 다니며 라이프 파운데이션에 찾아온 일련의 장면들에서 숙주들의 눈만 번쩍이는 연출은 감독이 영화적 서스펜스 역치 값이 얼마나 낮은 지 확인할 수 있었다. 숨은 ‘라이엇’ 찾기 같은 기생 공포물 공식이 히어로 영화와 만나 만들어낼 수 있던 시너지가 무궁무진했다고 믿는다.
영화 [베놈]은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를 답습한다. 소니가 어떠한 특이 장치 없이 이 영화를 거대한 마블 시네마틱에 합류시키고 싶은 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영화에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빠른 손절이 중요하다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