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회색인간> review
밥이 먼저냐 예술이 먼저냐?
<회색인간>에서 예술은 자신의 역사, 기록에 대한 욕구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문자, 그림, 음악의 형태로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감정적 부분을 묘사하고 아름답게 꾸민다. 사람들은 예술가의 묘사를 감상하며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색인간>에서의 예술은 당사자들의 비참함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의 예술은 유희에 대한 욕구, 공감에 대한 욕구라는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식주가 해결이 되어야 그 다음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욕구의 위계질서가 그리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감수하고 보고 싶은 그림을 보러 떠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노동과 휴식만 반복되는 생활을 즐길 수도 있다. 당장 <회색인간>에 묘사된 사람들의 상황 역시,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예술에 대한 욕구는 남아있는 모습을 보인다.
먹고사니즘과는 다른 욕망,
그리고 변화의 초석
다만, 예술로 충족되는 욕구는 의식주에 대한 욕구와 다르게 ‘나’ 뿐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는 차이점을 가진다. 유희와 공감은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 사회, 세계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 갇혀 있지 않게 하는 것, 나에게 다른 사람의 생각과 영향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성질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 예술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속도와 크기는 모두에게 다르다.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영향을 받아 같은 정도로 변화하지는 않으며 그 변화는 눈에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한 개인의 일생 동안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긴 시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예술이 그 사회를 아주 조금씩, 하지만 아주 크고 넓게 바꾸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이던 사회의 구성원들의 생각이나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은 사회의 틀을 바꾸는 초석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긍정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수백년이 지나서 보았을 때도 ‘긍정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적을 가진 예술이라도 관객의 시각에 따라, 그들의 생각에 따라 해석된다. 예술은 누군가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저 ‘변화’하게 만든다.
<회색인간>에 묘사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술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아마 모두가 이렇게 변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중 누군가는 자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노래도 부르지 않고, 빵도 나누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분명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변화가 ‘예술’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예술로 인해 변한 사람들과 그 공동체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 출발점은 하나의 노래였고, 그것이 모두를 얼마간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흐름이 그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혹은 그 다음 세대 이후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예술을 받아들이며 사는 삶이 노동시간을 뺏기게 되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과 감정 기분을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모두가 받아들이는 변화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영역과 이해관계가 얽힌 세상을 하나의 영역인 예술이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킨다는 생각은 자만이다. 예술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할을 과대 포장한 작품들을 통해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변화라는 것은 아주 거대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조금씩, 다양한 것이 모여 큰 변화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어떤 변화의 출발점,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