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UBUD_day5
발리에서는 나를 AHN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통 해외에서는 내 이름과 비슷한 영어식 이름을 쓰곤 했는데 여기서는 늘 AHN.
그냥 발음하기 편해서 그랬는데 요가반에서 만난 옆자리 외국인에게 나는 안, 이야. 안은 한자로 편안할, 이라는 뜻이야.라고 하니 좋아라 한다.
내 이름은 순수 한글이라 뜻 같은 건 없고 작명하신 아버님은 ‘이름이 예뻐서 예쁘게 크라고’ 지었다고 했다. 예쁜 이름 지어줬는데 망나니처럼 커서 미안해 아빠.
아무튼 발리에서 깨달은 내 이름, 정확히는 성의, 기분 좋은 의미. 그래, 이름처럼 편안한 삶이어라. 점점 더 편안하고 기복 없는 삶이 최고인 것 같아.
정글 속 리조트에서의 첫날. 눈 끄자마자 커튼을 여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우아, 이래서 다들 정글 뷰, 정글 뷰 하는구나!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합격도 불합격도 알려 주지 않는 회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지원자 안 AHN은 현재 해외 체류 중이라 유선 상의 연락이 어렵습니다. 하여, 제가 혹시 연락을 놓친 걸까 확인 차 문의 드립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연락은 줘야지 너네 정말 이렇게 일할 거늬???
뜻밖에 칼답이 왔는데(일처리 속도 봐라) 아직 면접이 진행 중이라 합격 통보가 늦어지고 있단다.
아직 너님 탈락 확정은 아니고, 너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탈락일 수도 있겠지. 열심히 찾는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흐음. 이메일 보낼 때, 아니다 공항에서 그 생난리를 칠 때이미 불합격으로 간주하고 포기했던 회사라 그런지 연락을 준다니 기다려 봐야겠네 하고 간단히 생각하기로 했다.
기대하면 실망한다. 더 이상 회사 문제로 들볶이고 싶지 않아. 작년의 그 망할 상사 3 트리오를 겪고 나니 직장에는 더 이상 큰 미련이나 기대가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발리인 걸. 뭐가 더 필요해?
오늘은 계단식 논의 기가 막힌 뷰를 볼 수 있다는 Tis cafe에 갈 것이다. 우붓 시내에서는 거리가 좀 있는데 내가 좀 더 안쪽으로 들어온 바람에 15분 정도면 갈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하면서 맞춰 놓은 생체리듬 덕분인지 칼같이 7시에 눈이 떠져서 일찌감치 조식 먹자마자 커피나 한잔 하려고 왔다. 이런 풍경에서 커피나 한잔이라니.
사실 온갖 핫플만 다니는 것에 살짝 현타가 와서 그냥 시내나 다닐까 했었는데 과감히 출발한 나님 칭찬해. 여길 왜 안 가요?
아침 일찍 도착한 덕분에 그다지 덥지도 않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너무 좋았다. 조식도 두둑이 먹었겠다 아이스 라테 한 잔 시키고 멍.
글 좀 쓰다가 멍 좀 때리다가 유유자적 있다 보니 배가 고파진다. 오늘 점심은 끝내 준다는 짬뽕 먹으러 갈 거다. 어째 메뉴가 점점 대놓고 한식이네.
예전에 왔을 땐 인도네시아 음식 정말 환장하고 먹었었는데 이상하다. 내가 변한 걸까 인도네시아가 변한 걸까. 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던 레오Leo는 잘 있을까. 베키, 얀띠, 얀. 모두 그립다.
고젝 바이크도 한참 걸려 도착하는 깊은 숲속에서 다시 센터로 나왔다. 얼큰하고 칼칼한 짬뽕 먹어야지.
???
얼큰하고 칼칼한 제 짬뽕 어디 갔어요?
no spicy라고 했더니 매콤한 고춧가루 싹 빼고 만들어 주셨다. 하하. 지금 한국인의 매운맛 무시하나요.
다시 칠리 파우더, 그냥 고춧가루라고 해도 알아들으신다, 달라고 해서 팍팍 뿌리니 비로소 no spicy 짬뽕이 완성되었다.
서로 의미가 달랐던 no spicy 덕에 개운치 못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바이크 타고 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걸으며 센터 이곳저곳을 다니는 재미도 나쁘지 않아 조금 걷기로 했다.
정말 덥다. 한낮에는 되도록 안 돌아다니는 게 답인데 일분일초가 아까운 여행객이 그게 될 리가.
여기 가면 무조건 한국인을 만난다는데 일단 나는 못 만났다. 커피 맛이고 뭐고 걷느라 지친 탓에 롱블랙을 아이스로 주문해 들이켰다. (산미가 꽤 강했던 듯)
여기 앉아서 또 글을 좀 쓰다가 no spicy 짬뽕으로 계속 아쉬웠던 마음을 달래려 김치찌개를 먹기로 했다.
그래요, 저 한식파예요. 이제 어쩔 겁니까! 저랑 안 놀아줄 거예요?
며칠간 쪼리를 신고 다녔더니 발가락이 욱신거렸다. 햇빛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오래된 지병(?)인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햇빛 알레르기 덕분인지 때문인지 학창 시절 운동장 뙤약볕 아래서의 추억은 없다. 엄마가 선생님께 부탁해 모든 야외 활동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침울하게 그늘 아래 앉아있는 나의 표정을 본 건지 만 건지 몇몇은 내게, “너는 뭔데 특별 대우를 받느냐.”라고 물었다.
특별 대우라니. 나는 남들과 다르고 싶지 않아. 나도 뙤약볕에서 몇 시간을 있어도 조금 따가울 뿐 밤새도록 울면서 한숨도 못 자거나, 손과 발에서 불이 나는 듯한 열감에 고통스러워 뒹굴지 않아도 된다면. 나야말로 간절히 바라는 바야. 이렇게 그늘 아래서 ‘남들과 다르게’ 있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결국 고등학교 때까지 야외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햇빛 알레르기, 아니 알레르기 자체가 흔하지 않았던 터라 친구들에게 설명하기도 어려워 그냥 나를 오해하게 두었다.
친한 친구들이,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본, 대신해서 싸워 주기도 했다. 너희들이 뭘 알아. 얘 우는 걸 못 봐서 그래. 정말 힘들어한다고! 당장 꺼져!!
사실이었다. 처음 알레르기가 발병한 것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당시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다 같이 수영장에 놀러 갔다. 정말 신나게 놀았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손과 발의 감각이 조금 무딘 것 같고 감각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나는 그야말로 펄쩍펄쩍 뛰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감자와 오이를 갈아 손과 발에 올려주고 얼음으로 열감을 식혀 주던 엄마도 결국엔 눈물을 훔쳤다.
그때부터 나는 햇빛을 오래 쐬면 안 됐다. 무슨 이유에서건 햇빛을 피해야 하는 운명이 된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체질이 좀 바뀐 줄 알았는데 가을에 제주도에 갔다가 알레르기가 또 올라왔다.
무방비 상태로 오랜 시간 운전한 탓이었다. 방심했다. 나는 제주도의 한 숙소에서 밤새도록 찬물에 수건을 적셔 손에 열감을 식혀야 했다. 어른이 되었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손톱이 하얘졌다. 병원에 가 봐야 햇빛을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아이러니인 건 내가 꽤 까무잡잡한 피부라는 사실이다. 이 고통을 설명해도 안 겪어 본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런 까무잡잡한 피부로는 설득력이 너무 떨어진다고요.
신, 정말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야겠어요? 이런 병을 주려거든 조금만 햇빛을 쐐도 눈에 띄게 벌겋게 달아오르는 흰 피부여야지요!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기로 한다. 내일부터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게 좋겠다. 예쁜 옷 잔뜩 가져왔는데 여행 내내 반바지에 티셔츠, 스케쳐스의 등산 모자. 이젠 운동화라니. 패션 피플 체면 다 구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