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잠자는 집시

by 잠자는집시

심리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은 나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셨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냐고.

남편과 1년 정도 아무도 모르는 해외에 살다 오면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임신 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얼른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서 아기를 만나는 것. 그것만이 내가 구원 받는 길이라 생각했다.


임신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을 정도로 집착하는 나를 자각하며, 임신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봤다.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사회의 커리큘럼을 충실히 따라온 나. 목표했던 대로 인서울 대학교에 진학하고 시험기간에는 성실히 공부해 원하는 성적을 받았다. 졸업을 하고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 나쁘지 않은 연봉을 받았다. 목표를 세우고 나의 열심을 다해 원하는 결과를 이루어왔다. 생각했던 대로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했으니 이제 임신과 출산을 할 차례였다.


상담 선생님은 살아 오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던 적이 있었냐 했다. 비슷한 또래들과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누군가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임신과 취업을 비교하게 됐다. 나는 취업의 과정이 조금 힘들긴 했으나 그건 납득할 수 있는 어려움이었다. 평범한 문과생은 수요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나보다 좋은 학교를 나와 더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아니까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신은 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데 내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실패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분명 임신은 노력에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선 임신과 출산이라는 열매를 거저 수확해 유유히 떠나가고, 난 그걸 지켜봐야 했다. 두 번이나 유산이라는 결과로 뒷통수를 맞아야 했는데, 내 손 끝에 닿은 열매를 영문도 모르고 빼앗기는 것 같았다. 임신은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것임과 동시에 자꾸만 좌절되는 것.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나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전쟁 같다는 육아를 겪고, 사춘기 소년, 소녀와 지지고 볶게 되더라도 그의 작은 생채기 하나도 마음이 아린, 한 번의 생에서 가장 사랑할 사람을 만나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었다. 분명 겪지 않았지만 알 것만 같은 사랑을, 지금도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남편과 나를 닮은 아이를 통해 경험하고 싶었다.

엄마, 아빠에게 받은 아낌 없는 사랑과 무조건적인 지지, 혼자 밤늦게 들었던 심야 라디오와 MP3, 친구들과 깔깔 거리며 누볐던 등하교길, 사람들과 나누었던 많은 기쁨과 슬픔. 그렇게 형성된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풍요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아이도 사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온 세상의 사랑을 만끽하며 살길 바랐다. 엄마, 아빠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동시대에 함께하는 생의 최고의 순간을 그려왔다. 임신을 내가 달성해야 할 목표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죄스러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성취가 아니면 무언가 싶다.



취업한 첫 해, 뉴욕여행을 갔을 때 현대미술관에서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보았다.

밤이 깊은 사막, 밝은 달 아래 집시 여인이 잠들어 있다. 사막을 하루종일 떠돌았는지 지팡이를 손에 꼭 쥐고서. 그 옆엔 사자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서 집시를 바라보고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어린이를 위한 도슨트 오디오 가이드가 있었다. 어린이의 시각에서 작품을 쉽게 설명해줌과 동시에 그 해설이 어른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아 좋았다.

이 그림의 앞에서 오디오 가이드는 말했다.

"무시무시한 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집시는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네요.

여러분은 사자가 집시를 잡아먹을 것 같나요?

혹시 사자가 집시를 지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2초 뒤 집시는 사자에게 잡아 먹혔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자는 유유히 길을 떠났을 수도 있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집시는 사자의 유일한 친구라서 다른 무서운 짐승이 집시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주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이후로 이 그림이 좋아 PC와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두고 오랜 시간을 보아 왔었다. 나를 언제 덮칠 지 모르는 사자가 내 인생에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면, 나는 두려움을 모르는 집시처럼 살고 싶었다. 이제 와 집시의 얼굴을 다시 가만히 들여다본다.



시험관 시술을 시작했다.

우주에 내가 살 뻔 했던 나의 인생 2만 개가 있다면 그 중에는 또 다시 계류유산, 혹은 선택유산, 막달 사산, 양수 파열, 탯줄 꼬임 사고 같은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를 살아내는 내가 있다. 잠자는 집시처럼 나는 결코 의연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건, 나는 포기할 수 없다. 다가 올 어떤 시간에다 대고 말한다.


우리는 반드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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