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 내려가서 깜짝 놀래켜 주려고 모든 준비를 마쳐두었었는데 또 수포로 돌아갔다. 바로 다음 주로 잡아 두었던 일정을 모두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다시 임신과 (거의)유산을 동시에 알리게 됐다. 엄마는 온갖 식재료며 반찬을 이고 지고 올라왔다. 열차에서 내린 엄마가 날 보자 마자 다가와 내 손을 아주 꼭 잡았던 게 생각난다.
절박유산으로 진단서를 써 주셔서 회사에는 병가를 내고 그렇게 엄마와 며칠을 보냈다.
엄마와 남편은 아기가 떠나지 않을거라 확신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는 엄마를 배웅하며 엄마와 얘기했다.
"엄마, 정말 아기 건강하겠지?"
"그럼, 당연하지."
그래, 이렇게 벌써부터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은 너는 건강할거야. 저 멀리 역이 보이자 마자 엄마는 한사코 혼자 갈 수 있다며 나를 돌려 보냈다. 자꾸만 나를 돌아보며 멀어지는 엄마를 곧 등지게 되었을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무엇이 두려웠을까.
엄마는 곧 다음 주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기 심장이 너무 희미해 결국 유산되었기 때문이다.
7월,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폭우가 쏟아지던 때 나는 또 한번 아기를 잃었다.
첫 번째 소파술을 했던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초음파를 확인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범프에 가려져 있던 아기가 하나 더 보인다고 하셨다. 그리고 역시 심박이 없다고. 우리 아기는 쌍둥이였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세상에 더한 슬픔도 많아."
나는 내가 느껴야 할 슬픔의 정도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첫 번째 유산을 했던 때, 엄마는 엄마 역시 오래 전 첫 번째 아기를 유산했었다고 말해줬었다. 주수가 좀 되어 유도분만을 했어야 했던 것 같다고.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잊고 살았다 했다. 나는 놀랐다. 이토록 끔찍한 일이 어떻게 잊힐 수 있어.
게다가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 열 살배기 아들을 사고로 잃어야 했다. 엄마가 지나온 태산 같은 인생 앞에 내 슬픔이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슬픔은 따로 존재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오래 품고 있지도 않았으니, 얼굴을 본 적도 없으니, 괜찮아져야 했다. 나의 유산이 중기 유산, 막달 사산이 아닌 것에 감사해야 했다. 아기는 다시 가질 수 있으니까 나는 괜찮아져야 했다.
시련을 극복한 멋진 나를 상상했다. 엄마가 너를 이렇게 힘겹게 만났단다, 아기에게 말해주는 상상을 했다. 친구를 만나 치킨을 먹고 노래방을 가고 울고 웃고 그렇게 괜찮아지고 있는 줄 알았다.
유산휴가 이후 회사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책상에 앉아 업무를 하는데 가만히 있는데 눈물이 나왔다. 이내 마음이 터져버릴 듯 하면서 아무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고 업무를 전혀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몸도 그랬다. 수술 후 지속 됐던 출혈이 멎지를 않았다. 팀장님께 사정을 말하고 회사를 나왔다. 당분간은 재택 근무를 하기로 했다.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근처 심리상담소를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당장 오늘도 상담이 가능하냐고. 거의 응급실을 찾듯 심리상담센터를 갔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상담선생님은 지금 내가 빵빵하게 부푼 풍선 같다고 했다. 위로도 희망도 들어갈 수 없는 상태 같다고.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인정하다 보면 그런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했다.
8월에는 아빠 칠순 잔치가 있었다. 몸도 마음도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친정에 내려가기가 싫었다. 나의 반복된 유산은 분명 인간관계의 불편함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게다가 두 번째 소파술 직후 듣게 된 올케의 임신 소식 때문에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왜 하필 지금이어야 했을까. 동생을 축하할 수도, 곧 조카를 볼 자신도 없었다. 집에서 별 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으면 생각했다. 아, 저기는 유산 안 되는구나. 나만 유산하는구나.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 내가 끔찍했다. 가야 하지만 가기 싫다고 고뇌하는 나를 보고 결국 남편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가지 말아버려. 임신도 그냥 안해도 돼." 그렇다, 반복된 유산은 남편과의 불화를 피워냈다.
분명 우리는 함께 임신과 유산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다.
남편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했으나 나는 아직 다뤄야 할 슬픔이 너무 많이 남아 자꾸만 뒤를 돌아 보았다. 두 번째 유산 후 태아염색체 결과는 정상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말했다. "분명 문제가 있어야 했어. 염색체 이상이 없었다면 우리 정자와 난자의 질이 좋지 않은 게 원인이었을거야." 남편은 아기에게 이상이 없었다는 말을 들어 좋은 날이었다. 의사 말대로 이건 그냥 사고처럼 일어나는 일이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다시 임신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달랐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가장 문제였다. 문제가 있어야 대비를 할텐데 왜인지도 모르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유산을 했다는 게 억울하고 기가 찼다. 나에게 세 번째 유산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나에게 임신은 더 이상 설레는 일이 아니라 너무도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 끝은 결국 파국이었다. 나는 그저 울고 싶고 남편에게 위로 받고 싶었지만 남편은 내게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다. 자꾸만 불행 시나리오를 써 모으는 내가 이해되지 않아 남편도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남편이랑 얘기를 하다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내 가슴을 자꾸만 내려치고 싶었다.
남편을 향한 원망의 화살은 곧 나를 향했다. 이 모든 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 아기가 건강하지 못했다면 그런 아기를 만들어낸 것도 분명 나니까.
내 배에서 아기가 셋이나 죽었다. 두 번 모두 유산한 저주받은 나. 남들처럼 얼른 괜찮아지지 못해 이렇게 불화를 만드는 나. 그리고 잔상처럼 떠오르는 갓 태어난 조카를 품에 안은 엄마, 아빠의 모습. 행복한 우리 가족과 그렇지 못한 나. 불행 덩어리.
이런 마음들이 극한으로 치달을 때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자해하는 상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자꾸만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 몸이 고장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로소 남편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남편은 그저 나의 건강과 평온한 마음이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근 1년 반 내가 겪은 일은
“유산을 했다.”
“유산을 또 했다.”
두 문장이면 요약된다.
하지만 그 사이 겹겹이 쌓인 장면, 장면들이 있다.
만날 때 마다 “임신 준비는 하고 있어?” 친구의 어이 없는 물음에 조급한 마음이 증폭됐던 것.
고작 한달 남짓을 품고 있었지만 온몸에 힘이 없고 헛구역질로 괴로웠던 나날들.
유산을 들으러 병원 가던 때 배가 찢어질 듯 아파 신음하며 멈춰설 수 밖에 없었던 어느 빌딩. 그리고 지금도 그 곳을 매일 지나쳐야 하는 것.
유산휴가 때 너무 답답해 찾은 황량한 화담숲. 그리고 자동차 속에서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던 남편과의 정적.
유산 이후 갑자기 입덧약을 끊어 부작용으로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던 것.
분명 유산한 걸 말했는데 친구로부터 날아온 ‘딸 임신하는 법’ 링크를 담은 카톡.
내 사정을 알면서도 임신 계획으로 들떠 태명은 뭘로 할지 고민이라는 친구를 계속 봐야했던 것.
“너가 자꾸 힘들어하면 엄마, 아빠가 더 힘들잖니.” 아빠의 투박한 위로 때문에 더 죄책감이 들었던 것.
친구 결혼식에 가서 신부에게 귓속말로 “언니, 나 임신했어.” 란 말을 듣고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던 것.
소파술 직후 남동생이 “와이프 임신해서 몸 조심해야 해.” 라고 해서 참지 못하고 화를 냈던 것.
침대 머리맡에 있던 뱀이 그려진 아기 양말을 작은 방 서랍 가장 밑 칸에 고이 넣어뒀던 날.
두 번째 유산 이후 힘들어 잠깐 휴직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남편이 내 앞에서 깊은 한숨을 차마 숨기지 못했던 것.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동안 고생을 모르고 자라 와 지금 힘든 거라고 했던 남편의 아픈 말.
두 번째 소파술 후 한 달 넘게 출혈이 멎지 않아 큰 병원을 찾았을 때, 왜 다니던 병원이 아니라 굳이 여길 왔냐며 홀대 받았던 것.
시험관을 상담하러 갔을 때 얘기를 보태려 하자 짜증스럽게 “아, 무슨 얘긴지 다 알았으니까 검사 해보면 돼요." 했던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너무 힘들다고 했을 때 엄마가 그렇게 소심하면 안 되고 자꾸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 것이니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했던 것.
추모의 집에 계신 아버님 앞에서, 밝고 큰 보름달에게, 누군가의 소망과 소망이 쌓인 돌탑을 바라보며, 유산 후 떠났던 여행길 밤 비행기 안에서 떨어지는 별똥별들을 세며.. 빌었던 유일한 소원.
고작 초기유산이라는 두 개의 사건일 뿐인데, 나는 이 모든 장면을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하고 내밀한 나의 마음에 꽁꽁 품은 채 괴로워했다. 두 번의 유산으로 나는 사소한 일에도 자신감이 많이 결여되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었는데 모든 약속이 부담스러웠다. 임밍아웃 그딴 걸 보게 될까봐 인스타도 들어가기 싫었다. 유산이 흔한 일이라고는 하나, 분명 만삭 출산을 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회사에서 같은 팀 동료의 출산을 두 번 보아야 했고 미디어에서, SNS에서 마냥 행복하기만 한 임신 얘기를 보는 게 괴로웠다. 회사 인트라넷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출산 소식에 내가 내 눈치를 봤다.
"누구는 유산을 세 번이나 했대."
"나 아는 누구는 출산을 하다가 애기가 죽었대."
"우리도 첫 애기가 아니야."
"TV에 연예인 누구도 고생하다 시험관으로 아기 가졌대."
이미 내 마음이 지옥인데 누가 무얼 겪은 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