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
첫 만남은 다른 의미로 강렬했어. 나를 기다리면서 너는 게스트 하우스 응접실에 앉아 있었지. 기숙사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한쪽 다리를 꼰 채 아직 덜 마른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너를 지켜봤어. 너는 분홍색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고, 똑같은 분홍색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어. 원피스는 길이가 제법 길어서 무릎을 완전히 덮었지. 내가 다가가 조심스럽게 너를 불렀을 때, 너는 풀어헤친 머리를 살짝 위로 올려 나를 살폈어.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솔직히 그때 첫인상이 조금... 별로였어. 뭐랄까. 눈이 너무 날카로워 보여서 혹여 너무 까다로운 상대를 만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 낯가림이 심해서 그러고도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갈피를 못 잡는 눈동자로 네 원피스에 그려진 노란 병아리를 들여다봤어. 병아리는 순진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어. 그땐 네가 아니라 병아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었어.
기억하지? 내가 말을 할까 말까 한 자세로 있었잖아. 시간이 지나 친해진 뒤에 네가 내 첫인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지.
"꼭 똥 마려운 강아지 같았어. 좀... 답답하더라."라고.
네가 먼저 말을 건넸어. 오늘 처음 오셨냐고. 나는 그게 유럽에 처음 왔냐는 질문인 줄 알고 런던에서 처음 왔다고, 온 지 6일이 지났다고 대답했지. 그때 네 표정이 참 오묘했어. 미간을 좁히면서 뭔가 말을 꺼내려다 마는 것 같았어. 그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지. 상대를 당황시켰다는 생각에 나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어.
"아... 저! 벨기에 처음이냐고 물어보신 건가요?... 아... 네 네! 맞아요! 여기... 그... 그러니까... 숙소가... 참 따뜻하고... 조... 좋네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넌 전혀 웃지 않았어. 아니, 사람이 그래도 당황해서 말을 주절거리면 받아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처음에 나한테 그랬지? 내가 거리를 두는 것 같다고. 그건 전부 네 탓이야. 그땐 네가 무서웠거든.
때마침 한 명이 더 왔지. 키도 크고 다리도 길쭉길쭉한데 얼굴까지 잘 생겼어. K라는 친구였지. 지금도 너무 보고 싶은 동생이야. 어쨌든 K와 너, 우린 이렇게 다음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나갔어. 바로 다음날 근교 도시로 여행을 갈 계획이었지. 네가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눈 앞에서 뭔가가 자꾸 아른거려서 신경이 쓰이는 거야. 왠지 쳐다보면 안 될 것 같은데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는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어.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는데 자석을 갖다 댄 것처럼 눈이 그쪽으로 휙 가는 거야. 넌 그때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은 자세로 앉아 있었지. 내가 네 왼편에 앉아 있었거든. 분홍색 슬리퍼가 네 발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흔들리고 있었어. 내 주의를 끈 건 신발이 아니었어. 슬리퍼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주는 듯한 네 왼쪽 엄지발가락이었지. 엄지발가락에만 빨간 페디큐어가 칠해져 있었어. 그게 괜스레 신경 쓰이는 거야. 마치 투명한 물에 짓궂은 누군가가 빨간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려서 시선을 붙잡는 것만 같았지. 투명한 물에 빠진 빨간 잉크가 형태를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는 기분이었어.
내가 잠깐 멍해 있었나 봐. 그러다 순간 너와 눈이 마주쳤고, 너는 곧바로 발가락을 오므렸어. 슬리퍼가 땅에 떨어지며, 탁! 하는 소리를 냈지. 정신이 번쩍 들더라. 네 의문스러운 눈빛에 나는 거짓말을 들킨 아이 마냥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어. 그때 네가 말했지.
"저... 우리 맥주나 한 잔 할까요?"
너는 나와 동갑내기였고 K는 우리보다 두 살 어렸어. 맥주 몇 잔이 돌자 분위기는 금세 풀어졌어. 이런저런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건 앞으로 여행하며 몇 번이나 반복되는 것들이라 여기선 하지 않을게. 대신 우리는 여행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을 각자 하나 씩 꺼내 놓기로 했지.
군대를 제대하고 유럽 여행을 시작한 K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아이였어. 그럴 만도 해. 그때가 남자들에겐 가장 불안한 시기거든. K는 자신에게 여러 조건을 두면서 스스로 어떤 판단을 하는지 테스트해 보기로 했어. 이를 테면 한 달에 지출 제한을 걸고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고 싶다고 했어. 내겐 개똥 같은 소리로 들렸지만 한편으론 멋있더라. 아, 이건 그냥 K가 잘 생겨서 그런 건가. 아무튼.
너는 성격도 대답도 시원시원했어. 광고 대행사에 다니다 이직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아니면 언제냐 싶어 급하게 여행을 떠나왔다고 했지. 덕분에 회사를 다니던 남자 친구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버려서 미안했다고. 웃으며 얘기하는데, 음... 뭐랄까. 이때는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찌르더라. 지금 여행을 다시 돌아보는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난 그때부터 너한테 마음이 있었나 봐. 하지만 그 감정이 그리 명확한 건 아니어서,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나니 찌릿했던 감정은 깨끗하게 사라졌지.
너는 무엇보다 웃음이 헤픈 아이였어. 술이 조금씩 오르자 우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지. 나와 K의 별것 아닌 말에도 너는 '파하하하하하'라는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어. 나중에 함께한 동행들이 모두 한 번씩은 네 웃음소리를 따라 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어. 글로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어쨌든 소리 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파하하하하하' 정도 되겠다. '파'할 때 너는 가지런한 윗니를 한껏 드러내 보여. 그러면서 목을 살짝 앞으로 빼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혹시 머리가 앞으로 발사되는 게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생각도 들었어.
'하하하하하'는 사실 '하'와 '허'의 중간 소리야. '하'도 아니고 '허'도 아닌데 '하'에 좀 더 가까워서 쉽게 '하'로 표기했어. '하하하하하'로 가면 음이 단계별로 높아져. 가장 앞의 '하'가 '파-'와 같은 음을 내고, 마지막의 '하'가 가장 높은음을 내. 단어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어서, 그 웃음소리에는 마치 '웃고 말겠다'라는 너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어.
네 웃음소리가 특별했던 진짜 이유는, 그 너털웃음이 너의 차가운 인상과 대비됐기 때문이야. 이질적인 감각에서 오는 묘한 매력이 있었어.
그게 지금도 들리는 같아서
가슴이 미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