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
나를 사로잡았던 너의 매력 중 하나는 '그냥 해' 정신이야. '하면 되지, 뭐' 정도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만약 네가 이 글을 본다면 '파하하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릴 테지. 네 성격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 같다고 하면서 말이야. 항상 소심해서 작은 것도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나에겐 마법의 처방 같은 말이었지.
아침 일찍 길을 나섰어. 게스트 하우스에서 1분도 채 되지 않는 그랑플라스(브뤼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자 중앙 광장)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 낮에 그랑플라스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굉장하더라. 그 옛날 빅토르 위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극찬했다지? 정말 황홀한 광경이었어. 마치 거대한 중세 교회의 내부를 밖으로 까 뒤집은 느낌이랄까? 전날 밤, 건물들이 황금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 모습은 착각이 아니었어. 건물 기둥과 장식 문양에 금칠이 돼 있었는데, 그 부분이 햇빛을 받아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거야. 신을 믿진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더라.
스타벅스 커피와 와플로 허기를 채우고 있을 때였어. 저 멀리서 긴 팔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다가오는 사람이 보이는 거야. 와, K는 지금 생각해도 참 멋있는 아이였어. K에게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하고 나니 옆에 처음 보는 한국인 여성이 있는 거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낯을 좀 가리거든. 여성분도 팔다리가 긴 데다, 검은색 레이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풍기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어. 'K가 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을까'라는 생각에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의 카리스마에 압도 당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했지.
"야 너 뭐해?"
"예?"
"나야!"
"나.... 나... 요?!..."
"얘가 정말!"
라는 말이 끝나는 동시에 너는 선글라스를 벗었어. 날카로운 눈매는 어제와 같았지만, 옅은 자줏빛 아이섀도를 발라 여성스러운 매력이 한껏 묻어났어.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화장까지 하니까 빛이 나더라. 그게 진짜 너에 대한 첫인상 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일을 너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어. 달빛이 하얗게 호텔 창문으로 들어오던 어느 날, 네가 나에게 물었지.
"너 그때 나한테 90도로 인사한 거 기억나?"
"진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K가 왜 엉뚱한 여자를 데려온 거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지."
네가 '파하하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지. 유쾌하고 매력적이었어.
"어떻게 난 첫날 화장도 안 하고 네들을 만날 생각을 했을까?"
"화장하니까 정말 예쁘더라!"
"화장을 안 하면? 안 예쁘단 소리야?"
"왜? 안 예쁘다고 말하면 화낼 거야?"
"아니, 상관없어. 사실인데 뭘."
그게 너였어.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떠오르는 사람.
'그런 거지 뭐' '그래서 뭐', 이 두 가지는 인생의 양대 키워드이다. 경험으로 말하는데, 이 두 가지만 머리에 잘 새기고 있으면 인생의 시련 대부분을 큰 탈 없이 이겨낼 수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트위터 -
'그냥 해' 정신은 아마 그런 쿨(cool)함에서 나오는 것 같아. 뭐가 됐든 결과를 염려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일단 해보는 사람이었지. 항상 결과가 어떨지 미리부터 걱정하고 전전긍긍하다 결정을 미루는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어.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괜찮지 않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거든. 그러다 보니 너라는 캐릭터가 나에겐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 거야. 넌 정말 뒤끝이 없는 사람 중에 으뜸이었어.
아,
그때도 말했지만 넌 물론 화장을 안 해도 예뻐.
내가 너를 추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바로 이때 생겼어. 너는 옅은 복숭아 향이 나는 향수를 뿌렸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분홍 빛 복숭아꽃이 떠올라. 벚나무에 속하는 그 분홍색 꽃을 생각하면 봄이 되고, 봄이 시작되는 절기마다 네가 떠올라. 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날릴 때면 너의 달콤한 복숭아 향이 은은하게 흘러오는 것 같아서 가슴이 설레.
우리 셋은 스타벅스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함께 커피를 마셨어. K가 주머니에서 학종이 크기만 한 의문의 흰 종이를 테이블에 펼쳐 놓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 두 사람은 그것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 아마 그때 K가 와플 얘기를 했던 것 같아. 내가 스타벅스에서 사 먹은 와플은 벨기에 와플이 아니라나 뭐라나. 네가 옆에서 '벨기에 와플'을 꼭 먹어봐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지. K가 옥수수수염을 잘게 자른 듯한 무언가를 꺼내더니 하얀 종이 위에 올려놨어. 그때서야 나와 너는 K가 하는 행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
"너 그거 뭐야?"
"너...
마약 하니?"
너와 내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물었지.
"하하! 어르신들, 이거 담배예요! 말아서 피우는 담배! 이렇게 손으로 돌돌 말아서"라며 K는 미니어쳐 김밥을 말 듯 조심스럽게 흰 종이를 말았어. K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내게 그런 K의 모습은, 마치 피아니스트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똑바로 세워 손끝으로만 섬세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보였지.
아무리 정성스럽게 말아도 모양은 꼬질꼬질할 수밖에 없었어.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어서 나와 너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K가 하는 모양을 계속 지켜봤지. K는 종이 끝에 살짝 침을 묻힌 뒤 "여기 불을 붙여서 피면.... 켁!... 켁!.... 맛은 더럽게 없지만, 어쨌든... 담배가 돼요."라며 마른기침을 두어 번 내뱉더니 단숨에 남은 커피를 들이켰어. 내가 K의 입냄새를 걱정하고 있을 때, 너는 K에게 손을 내밀었지. "누나 이거 꽤 독해요."라는 말에도 너는 손을 거두지 않았어.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K가 건네는 담배를 받았지.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더니 겁도 없이 연기를 꿀꺽 삼켰어. 곧장 식도를 쏟아낼 것처럼 기침을 하더니,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외쳤지. 나도 K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결국 웃음을 터뜨렸어. 너의 '그냥 해' 정신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어. 달콤한 복숭아 향에 꼬릿 한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어. 꼬깃꼬깃한 담배 끝에 복숭아 색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보기에 따라 자주색 같기도 하고 분홍색 같기도 한 오묘한 색이었지. 그 색이 마치 너를 표현하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어.
브뤼헤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하염없이 펼쳐진 시골 풍경을 감상했어.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곳곳에서 풀을 뜯어먹는 소들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던 거야. 어릴 적 외할머니 댁 풍경이 딱 그랬거든. 30년의 세월 동안 기와집이었던 할머니 댁은 신축 빌라로 변했고, 드넓은 논밭에는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제는 옛날이 된 풍경이었지. 그래서일까? 오래전 잊고 있던 장면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떠오르니까 나도 모르게 아련한 기분에 젖어들었나 봐. 네가 그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너 골똘히 생각하면 인상 쓰는 버릇이 있어. 그러다 주름 생겨."
나를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며 네가 말했어. 그런 관심이 싫지 않더라. 그때 아주 조금 너를 알게 된 기분이 들었어. 물론 나를 찍은 동영상은 당장 삭제해 버리고 싶었지만.
한 시간을 달려 브뤼헤에 도착했어.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도 어두웠던 구름이 어느덧 사라지고, 새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겼어.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푸르름이었어. 누가 색보정 기능으로 하늘 부분의 채도만 선택해서 끌어올린 것 같았어. 아차! 미안. 너 이렇게 설명하는 거 싫어했지. 색보정이 어쩌고 하지 말고 쉽게 말하라고. 그럼 '누군가가 진한 파란색 페인트를 하늘에 쏟은 것 같다'라고 바꿀게!
문제는 햇빛이야. 미칠듯하게 타오르는 태양빛에 저절로 눈꺼풀이 감겨.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지인들이 그렇게도 선글라스를 챙기라고 했던 이유를 그때 안거야. 바보같이. 사실 한국에선 선글라스 쓸 일이 별로 없잖아. "유럽이라고 다르겠어?"라고 착각했던 거지. 준비물 우선순위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았다가 배낭 공간이 부족해서 그만 빼놓고 왔지 뭐야. 오히려 대량으로 챙겼던 휴족시간은 하나도 쓰지 않고 다 나눠줬어. 그걸 빼고 선글라스를 챙겼더라면. 젠장.
뭐든 그런 가봐. 평소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막상 손에 없으면, 사소한 상황에서도 필요성이 절실해지는 법이거든. 포르토에서 너와 헤어진 날, 서먹서먹해진 우리 관계의 마침표를 찍던 날, 나는 사실 조금 안도했어. 이 관계에 더 이상 감정 소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말이야. 일주일 뒤에 한국에 있는 너에게 전화로 말했지. 선글라스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걸 또 놓고오는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고. 곁에 있을 때 소중한 걸 모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보낸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했지.
그러고 보니 넌 검은색 레이벤 선글라스가 정말 잘 어울리는 친구였어. 레이벤 선글라스를 끼면 유독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는데, 아랫입술보다 윗입술이 더 얇아서 항상 가지런한 윗니가 살짝 드러나 보이는 게 특징이었지. 웃을 때마다 입꼬리가 뾰족하게 말아 올라가는데, 그때 얇은 윗입술이 점점 옅어져. 그 모습이 마치 새끼 고양이가 미소를 짓는 듯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