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헤
브뤼헤는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어. 옛 성곽을 따라 걸었던 그때를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동화 같은 풍경을 걸으며 나는 하루 동안 곁에서 네 모습을 열심히 담았지. 오래된 돌담에 넌지시 손을 올리는 모습, 푸른 들판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백조 떼를 보며 아이처럼 펄쩍 뛰는 모습,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서서 동화 같은 풍경에 감탄하는 모습, 그날 하루 동안 너를 모두 카메라에 담았지. 너는 참 다양한 표정을 가진 친구였어. 웃는 표정만 해도 36가지쯤 될 거야. 앞니를 훤히 드러내는 웃음과 앞니를 조금만 드러내는 웃음, 입꼬리를 올리는 높이에 따라 즐거움을 다르게 표현할 줄 알았지.
넌 마치 자신이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어. 네가 뒷짐을 진 채 브뤼헤의 유서 깊은 조약돌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내 쪽을 향해 부드럽게 뒤돌았어. 정확히는 내 카메라를 향해 돌아본 거였지만. 그때, 초록빛 나무 사이를 통과하여 산란하는 빛이 네게로 마구 흩뿌려졌지. 빛의 조각들을 담은 그릇을 누군가 고의로 네게 왕창 쏟아부은 것처럼. 마치 르누아르의 작품을 연상케 했어. 긴 머리가 찰랑거리며 금빛 물결을 일으켰고, 그 물결이 너의 긴 다리를 지나 가느다란 발목까지 이어졌어. 발끝을 살짝 세우면서 드러난 발목의 곡선이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어.
우리 일행은 브뤼헤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에 도착했어. 시대의 변화를 고증하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드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있었어. 하늘 위로 높게 솟은 종탑을 중심으로, 그 양옆에는 고딕 양식의 중후한 시청 건물과 성당, 레고로 조립한 듯한 모양의 건물들이 빈틈없이 붙어 있었지. 브뤼셀의 그랑플라스가 중후하고 절도 있는 느낌이었다면, 브뤼헤의 마르크트 광장은 수다스럽고 수더분한 느낌이었어. 아, 그때 네가 광장을 보며 이런 비유를 했었지. 체스판 가장자리에 체스 말들을 빈틈없이 채워놓은 모양 같다고. 기발한 비유에 맞장구를 치면서 내가 물었지. 체스를 둘 줄 아냐고. 너는 어릴 때 두 번 정도 해본 게 전부라고 대답했어.
체스. 우리가 프랑스 리옹에서 함께 했던 때가 떠올라. 아침에 근교 도시로 가는 기차를 놓쳐 오전 내내 호텔 침대에서만 보낸 날이었지. 그때 우린 시내 소품점에서 산 작은 체스판을 침대에 올려놓고 체스 말들을 체스판 가장자리에 쭉 세워보았지. 우리의 작은 움직임에 따라 체스판이 조금씩 꿈틀거렸고, 그때마다 체스 말들이 맥없이 쓰러졌지. 쓰러진 말을 세우다가 그 옆에 있는 말을 건드려 쓰러뜨렸고, 그 말을 세우다가 또 다른 말을 쓰러뜨렸지. 네가 '파하하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한꺼번에 모든 말들이 쓰러졌고. 그렇게 의미 없는 일들로 시간을 보내면서, 우린 서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었지.
"아마 이때부터였을 걸?"
하얀색 폰 하나를 체스판 가운데 놓으며 네가 말했어.
"뭐가?"
내가 쓰러진 검은 비숍 하나를 바로 세우면서 물었어. 이번엔 옆에 있던 나이트가 쓰러졌지.
"'브뤼헤 마르크트 광장! 그때 이 자식 (나를 가리키는 말이야.) 좀 귀엽네?'라고 생각했던 거."
네가 21번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어. 그건 입꼬리를 높게 올리면서 억지로 보조개를 만드는 표정이야.
우리는 광장 중앙에 있는 조각상에 둘러앉았어. 그 동상 아래에 걸터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 K가 사 온 맥주를 마시며 우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그 순간을 즐겼어. 강렬하게 쏟아지는 오후 1시의 태양빛을 받으면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어.
"오후 1시면... 이제 점심시간 끝나고 사무실에 앉아 있겠네. 이디야 커피를 모니터 옆에 내려놓고, 아마... 결제 보고서를 작성을 하고 있었겠지."
너는 양칫물을 헹궈내 듯 말했어. 그 말을 뱉어낸 후에 아주 개운한 표정을 지었거든. 나는 그때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양떼구름을 보고 있었어. 그러다가 네가 이어서 던지는 질문의 앞부분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
".....ㅊ구랑 왜 헤어졌어?"
"응?"
"여자 친구랑 왜 헤어졌냐고."
음.
여자 친구에 대해선 아직 언급한 적이 없던 터라... 나는 질문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질문의 맥락에 대해 이해하려고 잠시 뜸을 들였어. 어떻게 내게 여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단정 짓고 저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 생겼지. 여자 친구가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여자 친구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 적도 없거든. 너와 나, K는 서로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어. 네가 우리에게 남자 친구 얘기를 꺼냈고 내가 여자 친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여자 친구가 없다'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거든.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질문을 먼저 했겠지. '여자 친구 있어?'라는, 좀 더 평범하고 보편화된 질문 말이야. 여자 친구의 유무를 먼저 확인하고 그 뒤에 '왜 헤어졌는지'를 묻는 게 자연스러운 대화 아니었을까?
"그냥... 그런 것 같았어."
프랑스 리옹에서 내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네가 한 대답이야. 너는 그때 브뤼헤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나눈 대화로 추측해 본거라고 했지. 솔직히 놀랐어. 난 그때 우리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네 사진을 찍는데 열중하느라 (혹은 살아있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감상하느라) 몇 마디 나누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내 말에서 진하게 배어 나오는 '고독'을 느꼈다고. 네가 말했어. 처음엔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 자체가 원래 고독해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나라는 사람 자체가 고독한 것 같다고, 그래서 애가 좀 안쓰러워 보였다고. 네가 그랬지.
이별이라는 게 그렇잖아. 서로 다른 생각, 오해, 미움, 원망, 실망, 애원 등이 질서 없이 찾아오고, 결정적인 순간 서로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해봐도 답은 하나야. '서로 맞지 않더라'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그 지독했던 가슴앓이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어. 아니야. 그렇게 대답했는데 네가 무심한 표정으로 맥주를 들이켜는 것을 보고 술김에 다른 얘기를 했어. 뭉쳐있던 솜털 구름들이 어느 순간 어지럽게 흩어졌어. 흩어진 구름들을 손가락으로 세어보면서, 나는 내가 이별하던 그때로 너를 초대했지.
그녀와 내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나는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어. 나는 그녀에게 매달렸고, 그런 나를 남겨둔 채 그녀는 카페를 떠났어. 전철역까지 그녀를 따라갔어. 같은 전철에 올라타고서 사람들을 방어막 삼아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는 그녀를 몰래 지켜봤지. 한없이 침착한 표정이었어. 평소와 다름없는, 피곤한 업무를 이제 막 끝마친 사람처럼, 졸린 듯 평온한 표정이었지. 그 모습을 보니까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한 거야. 욕지기가 나서 다음 정거장에서 급히 뛰어내렸어. 화장실에서 한차례 속을 게워내면서 울었어. 그렇게 울면서 다시 속을 게워내고 또 울었어. 한없이 침착한 그녀의 표정이 떠올라서 울었어.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녀만 평화로운 게 억울해서 다시 게워내고 또 울었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별 이야기를 어제 처음 만난 사람에게 털어놓을 줄이야. 마치 내 치부를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어.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후련했어. 바지에 묻은 오래된 흙먼지를 털어낸 느낌이랄까. 나는 빈 맥주 캔을 들어 잔 방울 몇 개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네가 다음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광장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K가 다가왔어.
"형, 이 구도 어때요?"
K의 사진 속에, 동상 아래에서 늘어진 자세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너와 내가 있었어. 서로를 마주 보는 각자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지. 편안한 담소를 나누는 친구 같아 보이기도,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 같아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사진이었어.
프랑스 리옹에서 체스 말로 체스판의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을 때, K가 단톡 방에 그 사진을 올렸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타이밍이 기가 막혔지. 너와 내가 동시에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눴어. 프랑스 리옹의 작은 호텔방에서, 참새들이 노래하는 소리와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전부인 방에서.
"이때 널 꼭 껴안아주고 싶었어." 네가 말했어.
"왜?"
"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거든.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싶기도 했고."
"무슨 소리야. 전혀 울 것 같지 않았거든?! 괜한 걸 물어본 건 맞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난스럽게 대드는 시늉을 했어. 그런 나에게 너는,
"아이고, 그러셨어요?"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지. 그때 체스 말 하나가 다시 중심을 잃고 쓰러졌어. 나는 그것을 바로 세우며 네게 키스했지.
"야, 일어나 봐."
"응?..."
"일어 나보라 구!"
너는 막무가내로 내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어. 네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함을 느꼈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서 차마 너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지. 너는 어느새 나와 거리를 두고 멀어지더니, 스마트폰을 들어 조각상 아래 어색하게 서있는 나를 찍었어. 내가 어정쩡한 자세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 네가 나한테 외쳤지.
"야! 손 좀 치워봐! 넌 웃는 게 예쁘니까. 웃어!"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더라. 뜬금없는 질문으로 사람을 당황시키질 않나, 자기 마음대로 사진을 찍질 않나, 웃는 게 예쁘다고 하질 않나. 뭐, 마지막 멘트는 마음에 들었지만. 아무튼. 그러고 나서 너는 한달음에 달려와 내 어깨에 반쯤 몸을 기대며 사진을 보여줬지. 코끝을 간지럽히는 복숭아 향에 아찔했어. 사진이고 뭐고 혼란스러웠어. 술기운 때문일까? 왜 자꾸 두근거리지?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끌려도 되는 건가? 정신 차리자. 정신? 정신이 있긴 한 건가?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혼란하게 뒤엉킬 때 뒤통수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어. 그 부드러운 감촉에 두근거리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어. 방금 전 맞잡았던 오른손으로 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어. 2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너와 눈이 마주쳤어. 검은 레이벤 선글라스 안으로 네 눈동자가 보였지. 그 눈빛에서 온기가 느껴졌어. 참 이상하지? 하루 전만 해도 눈매가 날카로워서 네 첫인상이 차갑다고 느꼈는데... 이젠 한겨울에 모닥불 앞에서 마시는 핫초코처럼 너의 눈이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어. 네가 찍어준 사진 속에서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내가 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