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반
엄마가 될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있는 삶보다 없는 삶을 떠올리는 편이 자연스러웠고 딱히 아이를 가져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 모성애라는 게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8년 전, 내가 몸에 이상을 느낀 건 감기약과 링거, 3박 4일의 출장, 특히 전국을 거의 혼자서 운전하며 다닌 후였다. 뒤늦게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한 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약국을 전전하며 남편과 산모에게 좋다는 영양제를 골랐다. 혹시나 모를 일주일 뒤 검사에서 다른 소식을 듣고 싶었다. 아직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온기를 떠올렸고 잃을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내가 모르던 나와 만난 순간이었다. 배 속의 아이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자책감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든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가 아이 이야기를 꺼낼 때 일어나는 감정 변화와 거부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그 일이 있고 5년간 아이는 내 인생에 들어올 틈을 찾지 못했고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존재의 부재가 가르쳐준 깨달음은 컸다. 할머니가 내게 어떤 존재였고 얼마큼 영향을 미쳤는지는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서울 소재 대학교 진학을 반대한 부모님은 서른 중반, 결혼할 때까지 곁에 없었을뿐더러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내 곁을 지킨 건 할머니였다. (어머니의 반대가 싫어서 한 결정이었을 테지만…)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처럼 다정하지도 손주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루하루 마치기 위해 애쓰며 살았고 그의 눈에 나는 기대에 못 미치는 부족한 아이일 뿐이었다. 홀로 아들을 키운 억척같은 어머니, 고약한 시어머니, 고집 센 노인의 전형이었다. 잔소리를 혼잣말처럼 두 시간씩 늘어놓고 휴지도 세 칸 이상 쓸 수 없게 했으며 평생 듣지 못한 욕도 할머니에게서 다 들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간들을 거쳐 결혼했고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도피였다. 할머니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남은 생을 보냈다. 그 생은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서 이전보다 더 지난하게 마무리되었다. 길게 설명할 수는 없겠다. 마음 아픈 얘기는 그만하자.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부터 나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생과 사가 가른 사고의 패턴은 너무나 선명하게 전과 후로 나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정과 후회가 마음에 들끓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를 한 번 더 뵈었더라면,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서울에서 함께 살 때 더 잘할걸, 할머니의 짐을 실은 트럭이 고향으로 출발하기 전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전했으면,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자장면을 한 그릇 더 사드렸더라면, 그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같이 웃으며 즐겨보던 드라마를 봤다면, 그의 고된 삶을 조금 더 이해했더라면... 나는 되돌릴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더듬고 어린 시절 그의 품에 안기던 순간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던 모습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외동아들,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해가 가기 전 산부인과를 찾았다. 한 생명을 맞을 준비가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가족 중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생명이 찾아온다고. 하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의 지독한 아들에 대한 사랑(만나고 싶지 않은 시어머니의 전형이지만)과 마주했을 뿐이다. 아들을 향한 사랑은 할머니 자체였으니까.
배 속의 아이를 잃은 건 결혼한 이듬해 초겨울이었다. 할머니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본인의 부덕을 탓했다. 연관성 없는 억지는 한동안 이어졌다. 반박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을 견딜 뿐이었다. 매일 아침 임신했는지 확인하던 회사 대표는 유산 소식에 해야 할 일을 늘어놓으며 2주의 시간을 허락했다. 2주의 시간 동안 뭘 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배가 많이 아팠다는 것과 어떠한 의욕도 없었다는 어렴풋한 여운만 있을 뿐. 그렇게 몸을 제대로 추스를 새도 없이 회사에 복귀했다. 일은 정확히 2주 분량만큼 밀려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일주일 뒤 다른 직원 한 명도 배 속의 아이를 잃었다. 내가 스카우트돼서 회사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자격지심을 드러내던 여자였는데 같은 일을 겪어서인지 체외 수정이었다느니, 어떻게든 키워보고 싶었다느니, 자신이 다니는 병원 원장은 어떻다느니 궁금하지 않은 얘기를 늘어놓으며 울먹였다. 나는 잠자코 들었다. 그것으로 그 일은 끝이었다. 그녀와 나의 소식은 임원진을 제외한 직원들에게 공유되지 않았다. 몇몇 친한 동료에게 직접 털어놓은 것이 다였다. 당시 나는 그저 심하게 앓은 감기처럼, 누구나 어디서나 걸릴 수 있는 일 일뿐이라고 치부했다. 할 일이 많았고 2주의 공백만큼 더 완벽하게 일처리를 해야 했다. 한 달 뒤 기도원에서 새해를 맞았다. 한 해의 시작을 기도로 드린다는 그럴싸한 목적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현실은 일 때문이었다. 매번 마감 때마다 각기 다른 기도원을 전전했지만, 이번에는 천마산이었다. 각자 독방을 쓸 수 있다는 게 선택의 이유였다. (물론 아무나 이용할 수는 없다. 소속 교회가 있는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기도원에 오기 전 누군가에게 옮은 것이 분명한 노로바이러스에 걸려 고열과 두통, 복통에 시달리며 하루를 허비했다. 마음이 급했다. 금요 철야예배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글을 썼다. 매일 아침 성경을 큰 소리로 읽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마감을 서둘렀다. 결혼한 지 2년도 안 된 신혼이었는데 혼자 있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릴 여력이 없었다. 다음 달 마감에 쫓겨 시간을 빠르게 소비하는 사이, 같이 배 속의 아이를 잃었던 여자는 자연 임신에 성공했다. 그것이 나에게 보란 듯이 자랑이 되었다. 그녀는 임신을 자격지심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고 그녀와 친한 직원들이 악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앞에서 만우절 날 임신했다는 농을 던졌다. 그 후로도 비슷한 일들이 왕왕 있었다. 건강한 상태였다면 무시하고 지나쳤겠지만, (보기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방어의 기술은 비겁하게 그들과 똑같은 방식을 택했다. 같이 욕하고 비난하는 걸로 타당화하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여전히 부끄러움에 숨고 싶어 진다.
7개 월 뒤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부서를 없애기로 결정하면서 자연스럽게 퇴사의 수순을 밟았다. 그 과정에서 이유 없이 곡해하는 숱한 말들과 왜곡된 감정에 맞서 싸웠다. 마지막 잡지는 혼자 마감했다. 그 무렵 500미터를 한 번에 걷지 못할 만큼 몸이 약해졌고 운전을 하다가 숨이 안 쉬어지는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었다. 근무 마지막 날, 남은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회사를 나섰다. 이어 대표의 구구절절 미안하다는 사과의 메시지가 진동과 함께 도착했다. 헛웃음도 나지 않았다. 2년을 왜 버텼을까. (이후 큰 회사와 합병하면서 놀랍게도 다시 오라는 청을 받았는데 비슷한 청을 받은 직원이 없었거나, 나처럼 모두 거절했는지 더 이상 잡지나 책이 나오지 않았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전부였던 퇴사 후, 남편을 졸라 산책을 시작했다. 사람 살린다 셈 치라고 했다. 3개월간 거의 매일 걸었다. 뒷산도 걷고 동네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인근 하천도 걷고… 숨 고르느라 힘들었던 초반 레이스를 지나 계절을 느끼고 주변의 냄새와 변화에 반응하게 되었다. 조금씩 천천히 회복되는 와중에도 난 할머니를 떠올리지 않았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13년간 함께 한 할머니와의 추억 속에서 기대고 싶은 그리움이나 위안 따위는 찾지 못했다. 그런 줄 알았다. 오해는 무심함을 낳았고 나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할머니 만나는 시간 텀을 늘렸다. 열심히 걷던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할머니가 뒤뚱뒤뚱 걷던 모습이, 고관절 수술 후 걸음이 불편하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그리움처럼 겹쳐진다. 할머니의 모든 걸음걸음이 가족을 위한 사랑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타인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낮추던) 겸손과 작은 것에 감사하는 습관 같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음을 안다. 할머니는 내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 사실을 깨닫기 한참 전, 그러니까 지금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 퇴사 후 산책을 시작하고 점점 많이 걷게 되고 뛸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전과 다른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글.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과도 같은 글이 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