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눈으로 본 데이의 비극적 정체성
*주의사항*
해당 글은 영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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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들의 폭력은 잔인했지만 목적이 명확했다.
그들은 데이의 몸을 부수는 대신, 역할을 그 안에 새겨 넣었다.
반면, 샬로가 그의 뺨을 치는 순간, 데이가 살아온 상상계에 이념이라는 번역되지 않은 현실계가 난입한다.
그 폭력은 어떤 역할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관객과 서사, 배역만으로 유지되던 그의 세상이 통째로 부정됐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자발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욕망을 경유해 형성된다.
데이의 문제는 욕망이 왜곡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타인의 욕망만을 대변해 살아왔고, 욕망을 자기 것으로 발화한 적이 없었다.
데이는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한 채, 상상계 안에서만 정체성이 고정된 인간이었다.
스승, 샬로, 원대인 중 그 누구도 ‘데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경극 속 우희’를 원했다.
사실 데이가 정말 사랑한 것은 샬로라는 인간이 아니라,
패왕과 우희라는 서사 안에서만 성립 가능한 관계였다.
그래서 그는 버림받아도 무너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무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했다.
데이의 우아함은 선택이 아니라 방어였다.
우리는 이런 방어를 흔히, 품위라고 부른다.
스스로를 지우는 것, 반항하지 않는 것, 흔들리지 않는 형상이 되는 것.
존재가 지워지지 않기 위한 가장 안전한 자세.
그래서 그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된다.
원대인 곁에서 데이는 패왕별희의 마지막 대목을 부른다.
패왕이 포위되고, 돌아갈 길이 사라진 순간의 노래.
선택지가 소멸된 자리만을 떠돌던 그의 목소리.
데이의 마지막은 탈출이 아니다.
그에게 삶은 무대에서만 가능했고, 그 밖은 오류였다.
오류 상태가 지속되면 시스템은 강제 종료된다.
그 검을 쥔 사람이 샬로였을 뿐이다.
데이가 부른 것은 비극의 예고가 아니었다.
이미 끝나 있는 인간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그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선택할 수 없게 된 자신을 정확히 연기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노래는 아름다웠다.
갈등이 제거된 존재는, 언제나 완벽해 보인다.
우리는 그런 인간을 보며 예술이라 부른다.
그리고 안도한다.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는 과연 우리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 잘 배운 역할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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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감독 천카이거, 1993)
• 네이버 지식백과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상상계/상징계/현실계”
영화 속 연기를 보면서 처음으로 “무섭다”라고 생각했다.
한 인물을 완성하기 위해 한 사람이 스스로를 소모하고 끝내 던지는 과정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이 글은 영화 속 명장면들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영화를 떠나보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안녕, 청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