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이기를 포기한 자의 비겁한 부유
*주의사항*
해당 글은 영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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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는 두 명의 우희가 산다.
샬로와 함께하는 평범한 삶이란 무대를 완성하려 한 현실의 우희, 주샨.
그리고,
경극이란 무대 위에서 샬로를 영원히 소유하려 했던 예술의 우희, 데이.
주샨이 샬로에게 제안한 것은 ‘흐르는 시간’ 속의 삶이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발을 구르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온기를 나누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치열한 현실이었다.
반면 데이가 샬로에게 요구한 것은 ‘멈춘 시간’ 속의 영원이었다. 먼지 쌓인 경극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숭고함, 실체를 잃을수록 칼날처럼 벼려지는 고결함을 지키는 예술의 세계였다.
샬로는 이 극명한 두 세계 사이에서 끝내 정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부유는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두 세계 모두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결국 그의 ‘부유’는 두 우희가 각자의 생을 걸고 지켜온 시간의 축을 모두 무너뜨리는 가해의 도구가 되었다.
문화 대혁명이라는 시대의 파도 앞에서 샬로는 끝내 누구의 손도 단단히 붙잡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습니다. 저 여자와는 끝내겠어요.
샬로가 생존을 위해 주샨을 부정한 것은 단순히 아내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녀로 인해 발붙였던 현실 속 온기를 끊어내는 것이었다.
너 그랬었지? 더러운 원세경에게…
그놈에게 몸까지…
데이의 과거를 폭로할 때, 그는 자신을 유일하게 패왕이라 믿어주던 예술의 고결함을 제 손으로 훼손했다.
단샬로 동무, 당신이 패왕인가?
아니, 아닙니다. 그건 경극 속… 배역일 뿐입니다.
공산당원의 비아냥 앞에 그는 무력했다.
데이가 사랑하던 패왕은 무대 위가 아니라면 비루한 인간일 뿐.
현실의 손을 놓친 주샨은 목을 매었고, 예술의 성역을 침범당한 데이는 무대 위에서 스스로를 베었다.
두 명의 우희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무대를 완성하며 퇴장했을 때, 샬로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여전히 죽지 못하고,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끝나지 않은 생, 그러나 완성되지 않는 삶.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승리가 아니라, 그 어떤 가치도 지키지 못한 자에게 내려진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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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감독 천카이거, 1993)
그는 분명 그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피해자라는 자리에서 면죄부를 쓴 채 또 다른 누군가의 세계를 파괴했다.
시대의 폭력 앞에 인간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예술과 현실의 경계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이 질문들을 남긴 채, 그 시대는 그렇게 인간을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