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라는 비극의 구조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이해하기 위한 단종의 시간

by dilettante

*주의사항*

해당 글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기 전, 단종의 시간을 따라가기 위해 정리한 역덕의 기록입니다.

분량이 많아, 빠르게 넘기기보다는 천천히 읽어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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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하나. 단종 소개 요약

둘. 역사의 타임라인(즉위부터 사망까지)

셋. 엄흥도는 누구인가


조선 제6대 왕 단종

휘: 홍위

출생: 1441년 8월 18일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즉위: 1452년 6월 14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457년 10월 21일(향년 16세), 영월군 관아 관풍헌

가족관계

부왕 문종, 모후 현덕왕후 권 씨

1남 2녀 중 장남(동복누이 1, 서동생 1)

배우자 정순왕후(1454년 혼인)

후궁 숙의 김 씨, 숙의 권 씨


타임라인

1441 출생->1452 즉위->1453 계유정난

->1454 국혼->1455 양위->1456 사육신

->1457 유배 및 사사


비극의 단초

지나치게 어린 임금과 부재한 지지기반

단종은 1452년, 우리 나이로 12세라는 전례 없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성종(13세)보다도 어린 기록이다.

이는 단순히 ‘어린 나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종과 달리 성종의 뒤에는 든든한 지지기반이 있었다.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 씨, 왕대비 안순왕후 한 씨, 왕대비 소혜왕후 윤 씨.

거기에 막강한 권력자인 장인 한명회까지.


그러나 단종 곁에는 그를 대신해 권력을 행사해 줄 대비도, 정치적 방패막이가 되어 줄 외척도 없었다.

단종의 즉위는 정치적 보호막이 제거된 상태에서 한 소년이 홀로 정국 한가운데에 놓인 사건이었다.


권력의 공백, 의정부로 쏠리다

단종이 즉위한 초기에는 고명대신들을 필두로 한 의정부에서 대부분의 정사를 주도하여 처리했다.

대표적인 것이 인사권 분야였는데, 여기서 황표정사가 나온다.

황표정사란, 의정부 대신들이 미리 후보 중 한 사람에게 ‘노란 표시’를 해 올리면, 왕이 그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으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을 말한다.

황표정사는 임금의 인사권이 형식만 남고 실질은 대신에게 넘어갔음을 상징한다.


어린 단종이 성년이 되기까지는 약 7~8년의 시간이 더 걸린다.

표면적으로는 대신들에게 국정을 위임한 형태였으나, 단종은 세자 교육을 통해 다져온 학문적 토대를 바탕으로 점차 친정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기 시작했다.

불당은 선왕께서 세운 것이니 경솔히 헐 수 없고,
또 그 절을 비울 수도 없다.
이어(移御)하는 일이 대신이 선왕의 뜻을 이어 의논한 것이다.
단종실록 1권, 단종 즉위년 6월 20일 신사 3/4 기사

이는 어렸지만 4년간 세자 수업을 받았고, 할아버지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비극의 시작, 계유정난 이전까지의 이야기

갈라지는 세력구도. 종친의 대표자는 누구인가

이 과정에서 정계의 세력구도는 크게 두 사람을 기준으로 나뉘었다.
세종의 차남이자 야심가였던 수양대군과,
삼남이자 시와 그림 등 예술적 분야에 두각을 드러내던 안평대군.


종친이 두 대군으로 나뉘었다면, 대신은 의정부 주축 세력집현전 소장파(少壯派)로 갈렸다.
수양대군의 야심을 경계한 의정부는 안평대군을, 의정부 중심의 국정 운영에 불만을 품은 소장파 일부는 수양대군을 택했다.
안평대군은 문인과 여론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고,
이에 수양대군은 다른 선택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전략적 전환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상에 변동이 있으면 문인으로서 대우를 받음은 쓸모가 없으니,
나으리는 모름지기 무사와 결탁하여 두소서.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세조의 정난

수양대군은 책사였던 한명회의 조언에 따라 적극적으로 무신들을 포섭했다.
그러나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군이 공식적인 지휘 계통을 넘어 무인 세력과 사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자칫하면 역모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여기서 한명회의 묘수가 빛을 발한다.
그가 만들어낸 계책은 바로 “활쏘기 대회”로, 정변 준비를 놀이로 위장한 신의 한 수였다.


이를 통해 수양대군은 필요한 무사를 충분히 모을 수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이후 벌어진 계유정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안평대군은 문인과 여론을, 수양대군은 무신과 무력을 선택했다.
이 선택이 이후 모든 비극의 향방을 좌우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비극-계유정난

대호(大虎)를 잡아라

계유정난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모반이 아니었다.
수양대군은 정변 이전,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종친을 대표해 국혼을 주청하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며, 대신들에게 ‘체제 내부의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는 정변 준비를 은폐하기 위한 정치적 위장이었다.


명나라 사행 역시 단순한 외교 임무로만 보기는 어렵다.
조선 왕권의 정통성을 승인하는 최종 주체가 명 조정이라는 점에서,
이 사행은 결과적으로 수양대군의 존재를 명 조정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이는 그가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질서 속에서도 스스로를 ‘체제의 인물’로 위치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의 흐름을 가를 정변일이 정해졌다.
거삿날은 10월 10일. 그러나 정변 모의가 외부에 누설되는 일이 생겨 큰 동요가 인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김종서만 먼저 쳐낼 수 있다면 모의가 누설돼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식의 발언까지 한다

나는 너를 강제로 잡지 아니한다. 따르지 않을 자는 가라. 장부가 죽으면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한다.
나는 혼자 가겠다. 만약 어리석은 고집으로 기회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먼저 죽이리라.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세조의 정난

수양대군은 김종서 부자를 척살한 후 입궐하여, 대신들이 정사를 어지럽혀 ‘부득이하게’ 거사했음을 단종에게 강요하듯 보고했다.

그리고, 왕명을 핑계로 모든 대신들을 입궐토록 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살생부’가 나온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 한명회는 미리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의 이름을 정리한 명부를 만들어 두었다.

황보인, 이양 등 살생부에 오른 자는 죽고,

신숙주, 정인지 등 오르지 않은 자는 살아남았다. 계유정난은 선택이 아니라 분류였다.


결국, 안평대군파로 분류되었던 의정부 대신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고,

안평대군 본인은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다 교동으로 옮겨진 후 곧바로 사약을 받았다.


계유정난. 계유년에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다.

계유정난은 이렇게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과,

사실상 단종 정치의 종말을 함께 의미하게 되었다.


상중에 치러진 국혼

단종은 1454년 정비인 정순왕후와 가례를 올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1454년은 아직 선대왕인 문종의 상중이었던 시기.

국혼을 주청한 자는 수양대군이었고,

단종은 이미 상중 국혼이 전례에 없는 일이라며 뿌리친 전적이 있었다. 이제 그것이 정말 실현된 것이다.
상중에 치러진 국혼. 이것보다 소년 임금에게 힘이 없었음이 드러나는 요소가 있을까?


그렇게 상중에 가례를 올리게 되었지만, 단종은 숨을 죽인 채 몸을 낮추고 자신의 시간을 기다린다.


당시 수양의 나이 서른일곱, 단종의 나이 열셋.
시간이 흐를수록 수양은 노쇠하고 그는 청년이 된다.
당장의 권력은 수양대군의 손에 있지만, 시간은 단종의 편이었다.


단종은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윤대를 열고 경연에 참석하며, 그는 친정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
수양대군을 둘러싼 유언비어를 공론화하면서 숙부를 정치의 장 안에 묶어두려는 시도도 감행했다.


소년 임금은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을 견디며, 조용히 권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극의 서막, 양위

잇따른 주변인의 비극

1455년, 결국 단종은 양위를 선언한다.
이는 그의 자발적인 뜻이 아닌, 우회적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
금성대군, 혜빈 양 씨, 상궁 박 씨, 화의군 등 그와 가까웠던 인물들이 차례로 공격을 받았다.


금성대군이 화의군에게 면포를 선물한 것,

금성대군의 집에서 활쏘기를 한 것으로 트집을 잡더니, 이후에는 그들이 몰래 결탁해 모반을 꾀했음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혜빈 양 씨는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였으며,
금성대군은 그의 숙부로, 세종과 문종이 어린 단종을 자주 맡길 정도로 단종과 가까운 사이였다.
상궁 박 씨는 문종이 그에게 직접 보내준 상궁이었으며, 화의군은 세종의 서장자였다.
그들은 이때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해, 결국에는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사약을 받았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의 정치적 세계는 급속도로 축소되었다.
대신들이 제거되고, 종친들이 정리되면서
정국은 정돈되었을지 모르나,
단종에게 그것은 정돈이 아니라 ‘소거’였다.

내가 전일부터 이미 이런 뜻이 있었거니와 이제 계책을 정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속히 모든 일을 처판하도록 하라.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윤 6월 11일 을묘 1/2 기사

세조는 단종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세계를 하나씩 없앴다.

양위는 선택이 아니라, 남아 있는 세계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단 한 번의 기회

상왕 단종, 그는 이에 가담하였는가

단종은 수양에게 양위한 후, 경복궁을 내주고 창덕궁에 기거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상왕께서도 역시 너희들의 역모에 참여하여 알고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알고 있다. 권자신이 그 어미에게 고하여 상왕에게 알렸고, 뒤에 권자신, 윤영손 등이 여러 번 약속을 올리고 기일을 고하였으며,
그날 아침에도 권자신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니, 상왕께서 대도자를 내려 주셨다.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7일 을사 1/2 기사

단종은 외조모를 통해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준비한 거사를 미리 들었고,
거사 당일 오전 자신을 찾아온 외숙부 권자신에게 직접 칼을 하사함으로써 이에 가담했다.


무모하다 할 수 있는 시도였으나, 평생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안에 떨며 살아가느니
한 번의 무모한 승부에 모든 것을 거는 편이 낫다는 계산 하에 이뤄진 것이었으리라.


완벽했던 계획과 따라오던 천운, 그러나

그들의 최초 계획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기회로 삼아 세조, 세자, 한명회, 신숙주 등을 일거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어전에서 칼을 들고 왕을 좌우에서 호위하는 운검을 이용하여 단칼에 왕을 죽이려 하였고,
하늘이 그들을 돕는 양 그날의 운검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기까지 했다.
성승은 성삼문의 아비요, 유응부 또한 단종의 복위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허나, 연회장의 크기가 좁고,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별운검이 행사에서 제외된다.
결국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계획이 무너지니 이탈자가 나오기에 이른다.
거사의 전모는 성균관 사예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에 의해 세조에게 그대로 보고된다.

(중략)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창의하여 상왕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에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 하위지, 유응부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일 경자 2/4 기사

그 즉시 붙잡혀온 주동자들은 모두 모진 고문 끝에 역모를 꾀했음을 인정하였고,
고문에 못 이겨 옥사하거나, 자결하거나, 혹은 능지처참을 당해 3일간 효수되었다.


비극의 꽃, 강봉

노산군, 영월로 보내지다

사육신 사건 이후 단종의 처우에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와 사육신에 대한 동정 여론 덕분이었을까?


그러나, 단종이 성삼문의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고, 이에 동조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점부터 단종의 삶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반응하는 연속이 된다.
선택은 사라지고, 견디는 일만 남는다.
반년 후, 세조에게는 연일 상소가 빗발친다.

근일에 이용의 당 이개의 무리가 다시 상왕을 옹립하여 제 뜻을 쾌하게 하기를 꾀하매,
상왕이 또한 참여하여 듣고도 한 마디의 말을 꺼내어 전하에게 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상왕이 이미 간신의 꾀에 미혹하여 전일의 사직의 대계를 잊은 것입니다.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12월 20일 을묘 1번째 기사

세조는 이와 같은 대신들의 상소를 모두 불윤(不允)하였으나, 속내가 어땠을지 누가 아는가?
단종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자신에게 양위한, 엄연한 선왕이다.
그러니 단종을 함부로 죽이거나, 유배 보내기는 참으로 애매하다.

게다가 당시 세조가 어린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는 여론이 생겨 백성들 사이에서는 단종을 딱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유교에 뿌리를 둔 국가에서 세조는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상한 사건 하나가 터진다. 세조에게 명분이 생긴 것이다.
이는 바로 단종의 장인 송현수와 후궁 권 씨의 아비 권완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

백성 김정수가 전 예문제학 윤사윤에게 말하기를,

“판돈녕부사 송현수와 행 돈녕부 판관 권완이 반역을 도모합니다.”

하니, 윤사윤이 이를 아뢰었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1일 계축 2/3 기사

전말은 이러하다. 단종의 장인과 후궁 권 씨의 아비 권완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을 백성 김정수란 자가 알게 됐고, 이를 윤사윤에게 고발했다는 것이다.


수상한 점은 이를 밀고했다는 김정수가 누구이고,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변이 나온 직후, 세조가 사실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단종을 강봉하여 영월로 유폐했다는 점도 의심에 불을 지핀다.

이에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키니,
의식을 후하게 봉공하여 종시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오로지 너희 의정부에서 중외에 효유하라.

하고, 첨지중추원사 어득해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군자감 정 김자행, 판내시부사 홍득경이 따라갔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1일 계축 2/3 기사

클 홍(弘), 햇빛 위(暐)

장차 군주가 될 아이에게 붙여진, 지나치게 완벽한 휘(諱)였다.

조선 왕조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졌던 소년 임금은,

이제 팔자에도 없었던 노산군이란 이름을 부여받은 채 영월로 떠난다.


금성대군, 난을 일으키다

금성대군 이유, 세종의 육남이자 단종의 숙부가 되는 인물.
세조에 의해 일찌감치 단종 측근으로 분류된 그는 이미 안동의 순흥으로 유배를 간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백성으로부터 고변이 날아든다.

경상도 안동의 관노 이동이 판중추원사 이징석을 통하여 궐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유가 순흥에 있으면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합니다.”

하고, 또한 이유가 준 명주 띠를 바쳐서 증거로 삼았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7일 기미 1번째 기사
유(금성대군)가 이보흠과 더불어 모역한 것이 매우 명백합니다.
그 중재가 호인, 정유재, 석정, 범삼, 석구지, 범이, 이동, 안순손, 김유성, 안처강, 안효우, 황치, 김근,
신극장, 안당, 김각은 모두 각각 승복하였으니,
다 능지처사하고, 법에 의해 연좌케 하며,
재산은 적몰하게 하소서.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7월 3일 갑자 1/1 기사

금성대군은 단종이 영월로 이동하던 중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보흠의 시종 이동이 이를 고발하면서 사건이 발각되었고, 금성대군은 안동부사에 의해 추포된다.


그는 순순히 혐의를 인정하였으며, 그를 따르던 이들 역시 모두 처형되었다.
금성대군 본인 또한 사약을 받으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금성대군이 머물렀던 순흥은 ‘금성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고을 자체가 해체되었다.


세조는 순흥부를 풍기군에 편입시키며 순흥을 혁파했고, 향리와 백성들까지 대거 처벌했다.
이는 특정 인물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한 지역 전체에 가해진 징벌이었다.

이 과정에서 순흥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의 선비층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단순한 개인 처벌을 넘어, 지역 지식인 사회 전체에 대한 경고에 가까웠다.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은 단순한 모반 사건이 아니라, 반세조적 인물과 지역을 일거에 정리하기 위한 계기로 선택됐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 순간부터 단종은 ‘보호해야 할 선왕’이 아니라, ‘정리해야 할 위험 요소’로 전환된다.


비극의 끝, 사사

그 칼 끝이 향하는 곳은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의 곁에는 아무런 권속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정순왕후 송 씨까지도.
종묘사직에 큰 죄를 지어 유배를 떠나는 이가 어찌 권속까지 데리고 가겠느냐는 세조의 생각 덕택이었다.


단종은 지난한 여정 끝에 7월경 청령포에 도착하는데, 그곳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나머지 한 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이는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단종이 놓인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조정의 중심에 있는 왕이 아니었다.
그는 물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서,
감시받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선왕이었다.
공간이 줄어들수록,
단종의 세계 또한 함께 줄어들고 있었다.

청령포 안에서도 삼엄한 감시는 그대로 이어졌다.
혹여나 외부인과 연락할까 우려한 세조는 거처에 금부진무 한두 명을 붙박이로 붙여 두었고,
강가에는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대부분 단종이 유배지의 거처에서 사망했다고 아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청령포에 위치한 단종의 거처는 홍수의 위험이 있다 하여 오래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단종은 영월 읍내의 관풍헌으로 이거(移居)하였고, 이곳에서 한 많은 삶을 마무리했다.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단종이 이 누각으로 나와 마음을 달래곤 했다고 전해진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어지니 새벽달이 비추고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
하늘은 귀 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
열성어제 제2권, 단종대왕 시
-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음

금성대군의 복위 운동의 전모가 밝혀진 이상, 단종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여파로 인해 단종은 다시 일반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곧이어 사약을 받았다.
세조실록에는 장인과 화의군의 부고(訃告)를 들은 단종이 스스로 자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략) 명하여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다시 영(화의군)등의 금방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서 장사 지냈다.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신해 2/2 기사

단종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가장 유력한 주장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왕방연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한 타살설이다.


숙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왕방연은 단종에게 내려진 사약을 운반한 금부 도사였다.

숙종은 단종을 노산군에서 임금으로 추숭한 당사자이니, 발언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단종 죽음의 진실에 대한 열쇠는 선조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복궁에 있었다 하나 영월로 옮겨가 있었고,
그때 정인지가 영의정이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처치하기를 청하니, 세조는 물정에 구애되어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영월에서 사약하였으니 그 공사가 지금도 금부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영월 사람이 그 일을 기록하여 간직해둔 것이 있었는데 김취문이 관찰사로 있을 때 또한 그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3권, 선조 2년 5월 21일 갑자 2/2 기사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보건대,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졌다는 것까지는 명확한 사실로 보인다.
이제 중요한 건 사약을 받은 단종의 마지막이 어땠는지에 대한 것이다.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하고 면유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의 대의는 천지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종 대왕이 영월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 도사 왕방연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정중에 입시하였을 때 단종 대왕께서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그가 봉명신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천도는 논해야겠으니,
그 공생의 성명이 전해와서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면 본도로 하여금 계문하게 하라.”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1월 2일 임신 1/1 기사

숙종실록의 기록은 병자록을 바탕으로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병자록

여기서부터는 사료에 근거했으되, 나의 개인적 추론임을 밝힌다.
단종의 죽음은 기록보다 더 어둡고, 더 모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단종의 타살설은 현재로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숙종이 근거 없는 발언을 하였을 가능성도 낮거니와,

선조실록에서조차 금부 도사로 하여금 사약을 내린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당시 약효가 듣지 않아 사약을 내리고도 교살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단종이 순순히 사약을 받았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사약(賜藥)은 왕이 지체 높은 죄인에게 내리는 마지막 은혜요 베풂이었기 때문이다.


단종이 사약을 거부한 후 교살이든 자살이든 죽음을 맞이했다고 가정하면,

선택지는 두 가지가 남는다.


첫째는 유력한 견해인 타인에 의한 교살설,

둘째는 야사로 전해지는 자살설.


야사에서는 단종이 사약을 거부한 후 줄에 목을 매어 밖에서 당기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왕이 방 안에서 목에 끈을 감고 밖에서 당기라 하자, 영문을 모른 하인이 당겼고, 나중에 보니 왕이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는 야사에 전하는 자살설이 더 비극적 서사를 형성한다.
왕의 존엄과 하인의 무지함이 맞물린 이 구조는,

단종의 최후를 가장 비극적으로 설명한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을 예로서 장사 지냈다고 쓰여 있지만, 실상은 이와 전혀 달랐다.
세조는 단종 사후 그의 시신을 수습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종의 시신은 뜻밖의 인물에 의해 수습된다.


위선피화(僞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이, 엄흥도

일부 기록과 야사에 따르면, 단종의 시신은 제대로 수습되지도 않은 채 강에 던져졌다고 한다.
역모에 휘말린 선왕. 역적임과 동시에 선왕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존재.
그랬기에 그는 죽어서도 모호한 취급을 받는다.

노산이 해를 입자, 명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아성잡설
호장 엄흥도가 옥거리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 지냈다 한다. 이때 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매 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영남야언, 병자록

이렇게 강에 떠다니는 시신을 수습한 이는 지역 호장이었던 엄흥도였다.
그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문의 선산에 장례까지 치른 후 벼슬자리를 내려놓았고, 식솔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가 단종을 장사 지낸 곳은 현재 단종의 왕릉인 장릉이다.

숙종 대 복권 과정에서 왕릉 이장을 위해 내려온 지관이 해당 자리를 명당이라 판단하여,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고쳤다는 전승 또한 남아 있다.


후대 기록에는, 단종이 청령포에서 깊은 밤 홀로 통곡하던 모습을 보고 엄흥도가 이를 이상히 여겨 직접 찾아갔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을 건너 어소에 나아가, 밤중에 홀로 남겨진 임금을 위로했다고 한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이곳에 머문 지 오래지만 나를 찾아와 위로해 준 이가 아무도 없었는데,
네가 지금 찾아와 주었으니 정성이 가상하다. 초야에도 선한 사람이 있는 줄을 이제야 알겠구나.
(중략) 지금 너를 만나니 대신을 다시 만난 듯하고, 그 정성 또한 육신에 뒤지지 않는구나.”라고 하였다.
이후로 엄흥도가 매일 한밤에 왕을 찾아가 뵈었고, 왕도 이를 의롭게 여겼다.
강원 국학자료 국역총서 03, 충의공엄선생실기 제1권

이 일화는 사료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의 성격이 강하지만,
당시 단종이 얼마나 철저히 고립된 상태였는지,
그리고 엄흥도의 행위가 얼마나 예외적이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엄흥도의 자손들은 한동안 여기저기 숨어 살 수밖에 없었으나 현종 대부터 등용되기 시작했고,
숙종 대에 이르러 엄흥도 본인이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고종 대에는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와 함께 정승급의 관직이 추증됐다.

사료는 명령의 엄함이나 삼족의 위협을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엄흥도가 “홀로(獨)” 움직였다는 단 한 글자의 기록만으로도, 당시 그가 감당해야 했던 고독과 위험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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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선조실록, 숙종실록)

한국고전종합 DB 연려실기술(제4권-단종조 고사본말)

한국고전종합 DB 열성어제(제2권-단종조)

율곡국학진흥원 한국학 아카이브(강원 국학자료 국역총서 03, 충의공 엄선생 실기 제1권)


단종의 비극은 한 번의 정변이 아니라,

선택지가 하나씩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패배 외에는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위치에 놓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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