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기요, 그것을 도려낼 칼이다

제2장: 무대에 묶인 두 연인

by dilettante

*주의사항*
해당 글은 “신시컴퍼니 연극 햄릿”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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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것은 가장 먼저, 쉽게 얼룩진다는 레어티즈의 말은 옳았다.

오필리어에 대한 햄릿의 사랑은 분명 진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과 함께, 돌이킬 수 없이 얼룩졌다.


그는 더 이상 오필리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복수는 그를 구하지 않았고, 먼저 망가뜨렸다.

이제 모두 잊겠다.
나의 꿈, 나의 모든 희망, 정념과 사색들,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들을,
그 모든 잡동사니들을 나의 머릿속에서,
나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지우겠다!

이 속에는 사랑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사랑은 가장 먼저 밀려났다.

이후 햄릿은 제정신임에도 미친 척 연기하기 시작하는데, 폴로니어스는 그가 미친 이유가 제 딸에 대한 상사병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햄릿이 미친 이유가 정말 오필리어 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해 책략을 꾸민다.

소름이 끼친다. 휘장 뒤에 숨어 나를 지켜보는 저 눈들, 하지만 너무 뻔한 수작 아닌가.
하지만 아니야. 마지막으로 그분이 날 찾아왔을 때,
그래, 마지막처럼.
그 얼굴, 그 눈빛, 그건 사랑도 광기도 아니야.
그것은 깊은 슬픔.

그러나 결국 오필리어는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짜 놓은 연극의 배우답게, 햄릿에게 비수를 꽂아야 한다.

난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왜 내가 이런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어쩌면 그분도... 만약 그렇다면, 그분 뒤에도,
누가 있는 걸까?

햄릿이 죽은 아버지의 유령에 사로잡혔다면, 오필리어는 살아있는 아버지의 명령에 결박되었다.
두 사람 모두, 망령들이 설계한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한 배우였다.


곧 오필리어 앞에 나타난 햄릿.

햄릿은 그녀에게 상처가 될 말들만을 쏟아냈다.
그녀에게 순결하냐고 물었으며,
그녀는 아름다우니 순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더 이상 순수가 아닌,

배신의 신호였다. 그것은 어머니 거트루드에 대한

깊은 환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햄릿에게 어머니 거트루드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존재이자, 제 아버지에게 온 마음을 다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거트루드가 장례식 다음 날 클로디어스와 재혼함으로써 그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가족이 될 수 없었다.

그가 바라보던 완벽한 어머니의 모습은 완전히 깨졌다.
그런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자괴감은

결국 타인에 대한 불신을 넘어 자기혐오로 번진다.

당신, 죄인들을 낳고 싶어? 나 같은 악당을? 어머니는 왜 나 같은 걸 세상에 싸질러 놓았을까.
결혼하지 마. 애를 낳지 마. 세상은 이미 악당들로 넘쳐나! 아무도 믿지 마. 수녀원으로 가.

수녀원으로 가라는 절규는 오필리어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오염된 세계로부터 그녀를 떼어내려는

비틀린 보호였다.

이 둘의 마지막은 사망한 오필리어의 시신을 껴안고 절규하는 햄릿의 절망이었다.
영국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햄릿은 우연히 장례식 일행을 목격하고, 몸을 숨겨 지켜보던 중 장례식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오필리어임을 알게 된다.

그녀의 시신을 부둥켜안은 채 사만의 오빠가 하는 사랑의 말들을 태산처럼 쌓아 올린들 본인의 입맞춤

한 번보다 더 의미가 있을 순 없다고 말하는 햄릿.

햄릿의 사랑에 대해서는 젊은 날 한때의 충동적 감정이라 생각해야 해.
봄날 보랏빛 제비꽃처럼 가장 빨리 피지만 가장 일찍 시들고, 아름답지만 오래가지 못해.
그 달콤한 향기도 한순간일 뿐, 그뿐이야.

그들의 사랑은 분명 열정적이었고, 강렬했다.
그러나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속박 속에서 벗어난 후에야

죽음으로써 진정 하나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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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세부 출처표기는 마지막 글에 할 예정)
• 연극 햄릿(신시컴퍼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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