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중경삼림 리마스터링” 후기
*주의사항*
해당 글에는 영화 “중경삼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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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셰프 샐러드야? 질리지도 않아?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다른 것도 맛보고 싶을걸.
싫다고 하면요?
유보된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663은 늘 같은 걸 주문한다. 셰프 샐러드.
새로 제안되는 선택지는 그를 잠시 머뭇거리게 만든다.
663의 셰프 샐러드는 취향이 아니라 방어 기제다.
그에게는 선택함으로써 발생하는 변화를 감당할 용기가 없어, 변화라는 변수로부터 자신을 은폐한다.
그는 여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했음을 직감하지만,
남긴 편지조차 뜯어보지 않는다.
그저 집을 유지하고, 물건을 그대로 두며, 감정을 보존한다.
살고 있다기보다, 중단된 상태 그대로를 관리하는 것 같다.
그의 직업도 마찬가지다. 경찰이지만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구역을 순찰하며, 무너지지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정체된 상태를 빙빙 돌 뿐이다.
663의 방은 그 자체로 663을 보여준다.
그는 방안 물건들에게 말을 건다.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직접 대면할 용기가 없어, 젖은 수건과 마른 비누에게 슬픔을 외주 준다.
인격화된 사물들은 663이 슬픔의 주체에서 관찰자로 물러나게 돕는 장치이자, 자신을 보호하는 알리바이다.
고인 상태 그대로 썩어가던 663의 폐쇄회로에 페이라는 균열이 발생한다.
그녀의 무단침입은 구원이 아니라 강제 집행과 같다.
663이 유통기한이 지난 감정을 억지로 붙잡고 있을 때,
페이는 그 통조림의 라벨을 강제로 바꿔치기하며 그의 정지된 시간을 억지로 흐르게 만든다.
다만, 그것 또한 유통기한이 정해진 선택일 뿐, 책임까지 대신하지는 않는다.
663은 자유로운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는 땅에 발을 딛지만, 하늘을 나는 이들을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자유로운 사람들 곁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자유로움이 주는 책임과 결과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기에, 역설적으로 그는 더욱 굳건히 정착하려 한다.
페이는 원래 훨훨 날고 싶던 사람이다. 663의 방에서 전 애인의 흔적을 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떠난다.
그녀가 남긴 티켓의 목적지는 자유롭게, 그녀 마음대로 정해진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
아무 곳이나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요.
페이가 떠난 후, 663은 유보 상태에서 조금 나아간다.
제복을 벗고, 가게 주인이 됐다.
이제는 페이가 제복을 입고, 663이 내려놓은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는 자유를 동경하면서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누군가의 궤도 안에 머물 때만 안전을 느끼는 영원한 위성이다.
영화 중경삼림(감독 왕가위, 1995)
지난 12월 31일에 본 화양연화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진행하는 왕가위 감독 세계관 여행의 종착지.
첫 만남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곱씹을수록 잔향이 짙은 영화였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영화를 생각하자니 초록빛 아틀란티스가 떠오른다.
이미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을 도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