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후기
영화에서는 두 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와, 동물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
그리고 말한다.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는 일 자체가 믿음이라고.
힌두교를 통해 믿음을,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배웠죠.
신의 행하심은 참 신비로워요. 또 다른 신을 소개받았는데, 이번엔 알라라는 신이었죠.
그는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에 가까웠다.
세 개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가 끝내 붙잡고 있던 건 단 하나였다.
믿는다는 행위, 그 자체.
동물한테도 영혼이 있어요. 눈을 보면 알아요.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파이는 처음으로 리처드 파커의 눈을 마주한다.
그때의 그는 우리 안의 눈과
짐승의 눈이 다르지 않다고 믿던 아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증명한 ‘짐승의 야만성’ 앞에서
파이의 믿음은 무너진다.
영혼이 깃들었다 믿었던 눈동자가
그저 빛을 반사하는 신체 일부분으로 전락한 이후,
그는 자신이 읽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건조한 세계에 갇히고 만다.
파이가 리처드 파커와 다시 마주한 것은,
망망대해 보트 위 단 둘이 남았을 때였다.
그 바다 위에서, 그는 다시 리처드 파커의 눈을 본다.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었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으면 난 지금쯤 죽었을 거다.
난 녀석을 보고 긴장했으며,
녀석을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다.
연필 한 자루,
젖지 않은 그늘 한 자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생존 지침서 한 권.
일상에서는 소중함을 몰랐던 것들.
그것이 배 위에서는 전부가 된다.
리처드 파커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던 존재와 공존하게 되었다.
저 짐승이, 이제 내 삶의 이유가 되었다.
보트 위에서 리처드 파커와 ‘눈을 맞추는 행위’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포식자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생존의 응시와,
심연을 공유하는 존재를 향한 동질감의 응시.
뭘 보고 있는 거니? 말해봐. 뭐가 보이는지 말해줘.
각자의 눈으로, 같은 것을 본다.
바닷속 생명체, 침몰하는 배, 그리고 우주.
파이의 아버지는 짐승과 사람은 다르다고,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녀석의 눈에 비친 게
결코 내 모습만은 아니었어요.
틀림없어요. 느꼈거든요. 입증은 못하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생존의 문제 앞에서,
그들은 대화 한 마디 없이도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못했다는 거죠.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작별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영화는 말한다.
결국 누군가의 눈을 마주한다는 건,
상대의 영혼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그 눈동자 속에 투영하는 일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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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감독 이안, 2013)
지난달, 연극을 처음 보고 남긴 후기를 다시 들춰보았다.
그때의 나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만 골라 붙잡고 있었을 뿐이다.
생존과 본능, 거짓과 진실 같은 "이성적인 단어들"로만
가득 채워진 그 글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래서 영화까지 본 이후, 다시 글을 적어보았다.
연극으로 만난 파이와 영화로 본 파이는 또 달랐다.
연극에서 파이의 소년적 순수함을 강조했다면,
오히려 영화에서는 일찌감치 어른아이가 된 파이의 모습을 그렸다.
파이가 처음으로 육식을 하는 장면의 충격은 연극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파이는 어른스러운 면모가 강해 장면의 충격이 연극보다 크지 않았다.
영화까지 보고 나니 파이가 스스로 붙인
“무리수 파이”라는 별명이
그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재차 느꼈다.
내가 여러 차례 만난 파이는 복잡하고도 깊은,
마리아나 해구 같은 아이였다.
소설부터 연극,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매체에서
수작으로 남는 작품은 정말 드문데,
"파이 이야기"는 그것을 기어이 해냈다.
연극을 계기로 두고두고 기억할 좋은 명작들을 알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