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븐” 후기
*스포일러 주의*
해당 글은 영화 “세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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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도의 시선에서 본 세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에게 세계는 고쳐야 할 곳이 아니라, 처벌해야 할 장소였다.
그는 자신을 심판을 위한 신의 도구로 확신했고, 누군가를 단죄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존 도의 살인은 단죄가 아니라 “거울”로서 기능한다.
그의 살인은 "응징"이 아니라 "반사"다.
세계가 가진 윤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잔혹하게 드러내는 거울이다.
존 도의 살인 수법은 자칫 무질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교조적이지 않다.
즉, 무질서는 그의 방식일 뿐이다.
예를 들면, 존 도는 “탐욕”의 죄를 지은 변호사를 단죄할 때 그가 제 살을 직접 잘라내도록 한다.
이는 단순히 변호사에게 선택권을 준 게 아니라, 사회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자율성”까지 교묘하게 활용하여 체계 자체의 허점을 공격하려는 시도다.
“나태”의 죄를 지은 소아 성욕자의 경우는 어땠는가?
소아 성욕자는 바로 죽지 않았다. 최소한의 생명 유지만 하면서 살아 있었다.
이것은 살인이 아니라 존재를 이용한 시위였다.
존 도는 소아 성욕자를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들었고,
이를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지켜봤다.
경찰은 소아 성욕자를 발견한 직후 그가 살해당한 것이 맞는지조차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존 도의 범행은 단죄가 아니라,
사회가 폭력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밀스였을까?
사회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는 존재, 밀스가 바로 그 이유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밀스만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면, 서머셋은 왜 아닌지에 대해서.
서머셋은 체계의 부패를 목격하고 시스템 밖으로 도주하려는 '냉소적 관찰자'인 반면, 밀스는 체계 내부에서 정의가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다.
존 도에게 밀스는 파괴하기 가장 매혹적인 타깃이다.
시스템을 끝까지 신뢰하는 자의 붕괴만이 정의라는 구조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존 도는 “광기의 이상주의자”였다.
나는 그저 부럽다는 걸 말하려는 거야.
자네와 자네의 예쁜 아내를…
… 나는 자네의 평범한 삶을 시기했지.
존 도의 시기는 개인적 열등감을 넘어선 사회적 진단이다. 그는 타락한 세계에서 평범한 가정이라는 위선적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의 범행은 '이런 시궁창에서도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느냐'는 트레이시의 실존적 공포를 참혹한 확신으로 종결시키는 마지막 마침표다.
이런 세상에서 도저히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거든요.
이런 환경에서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죠.
존 도가 보여준 건 ‘혼돈 속에서도 진실은 드러난다’는 광기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서머셋은 그런 진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
서머셋 역시 같은 세계 인식을 공유했지만, 그는 그 혼돈 속에서도 ‘질서와 신념을 붙들겠다’는 인간의 저항을 택했다.
결국, 둘은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답했다.
존 도는 세계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도 타락해야 한다고 믿었고,
서머셋은 세계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도 인간만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었다.
같은 질문, 다른 해답.
존 도는 지옥의 거울을 들이밀었고, 서머셋은 그 거울을 끝내 외면하지 않았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은 질서를 택할 수 있다는 믿음.
그건 오직 지옥을 건너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비극적이고도 모순적인 신념이었다.
영화 세븐(감독 데이빗 핀처, 1995)
지금의 나는 수많은 과거의 명작들을 마치 도서관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쌓아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선입견 없이,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나에게 이다지도 큰 충격을 안겨준 영화는 "세븐"과 "해피 투게더" 외엔 없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처럼, 유독하게 남아버린 영화들.
이상은 과연 누구의 것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