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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n 01. 2023

너는 절친에게 그렇게 하는구나.

비즈니스 절친과도 마침표를 찍다.  

이 글 또한 참을 수 없는 팀장만큼 불편한 험담이 포함된 글입니다.

이런 글을 불편해하시는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해 드립니다.


2023.1.10


글로벌파견은 내가 관계에 가장 회의를 느끼게 한 결정적 사건이면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바꾼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작년 초부터 상사 K가 글로벌파견이야기를 했다. 인사부서에서 시행하는 제도가 아니라 우리 부서 자체적으로 인재육성을 위해 신설하는 제도로 1년간 미국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면서, 부서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 프로젝트. 하지만 1년간 미국을 간다는 결정은 누구에게든 쉽지 않다. 특히나 결혼을 했거나 애가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내가 12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가장 가까이 지낸 언니, 그녀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그녀의 절친이었고, 그 절친은 글로벌파견 이야기를 듣자마자 본인은 애가 있었기 때문인지 “미국은 네가 가라”고 했다. 
 

그 절친은 연공서열 순으로 국제회의를 다녀오고, 노골적으로 팀 미팅 자리에서 “000님(나) 미국 가면…”이라고 이야기하며 내가 마치 미국을 가는 것처럼 공론화하더니, 국제회의에서 미국 파견을 도와줄 회사를 본인이 미팅하고 온지라 본인이 미국파견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가는 것도 아닌데, 너니깐 내가 이렇게까지 준비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미 그 사람한테 넘겼을 거야”라고 수시로 나에게 공치사를 했다. 이미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는 와중이었으나 하도 들으니 미안하기도 해서 내가 준비해 보겠다고 넘기라고 했으나 어떤 영문인지 넘기지 않았다.
 
설마 설마 하는 파견이 현실화된 건 8월 중순. 인사팀 임원분이 솔깃해하셨다고 했다.

그즈음 나와 절친과 올해 초 이직한 언니와 셋이 만난 날. 이직한 언니가 나에게 물었다. 미국 언제 가냐고. 미국 가기 전에는 찐하게 봐야 한다고. 이미 내가 가는 걸로 기정사실화된 지 오래된 터라. 그런 와중 갑자기 그 절친이 본인이 주말에 친오빠를 만나 미국 파견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오빠는 영어로 절친 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아들이 어버버 했고, 절친 신랑에게 따라갈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절친 신랑은 회사 휴직도 어렵고 승진을 앞둔 시점이라 쉽지 않다고 하니 절친에게 미국을 1년 가는 건 득 보다 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단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나도 다른 언니도 의아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설마 진짜 보낼까 했던 파견이 가능해질 것 같으니 욕심이 난 건가 싶어 며칠 후 “OO이(절친 아들) 학교 가기 전(당시 6살)이니 혹시 가고 싶으면 알려줘. 나는 꼭 안 가도 되니깐.” 했다. 절친은 한사코 아니라고 했다. 형부가 미국에 가기 싫다고 했다면서. 형부가 미국에 가기 싫은 거면 절친은 역시나 가고 싶은 거였다. 절친은 끝내 아니라고 했지만.
 

그 사이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다는 미국살이를 위한 면접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절친에게 물었다. 진짜 가고 싶은 거라면 나는 면접을 보지 않겠다고. 그러니 그건 아니라면서 아직 신랑이 원치 않아서 자기는 좀 힘들지 않나 싶은데 면접은 보겠다고 했다. 마치 그게 나를 위한 것인 것처럼 이야기하며. “새로 신설한 제도에 한 명만 지원하는 게 상사 K의 면이 안 서는 일이고, 한 명만 지원해서 그 사람이 되는 것도 내정자가 있었던 것처럼 비칠 수 있으니 나는 지원은 하지만 허수야. 너만 단일 후보처럼 비치지 않게 내가 백업하는 차원에서 면접 볼게”라고. 대화를 할수록 가고 싶은 마음은 차고 넘쳐 보였는데 죽어도 아니라고 백업이라고만 했다.

면접 직전까지도 나는 너랑 달라서 누군가를 백업할 마음이 없으니 혹시 마음이 결정된 거면 알려 달라고 했으나 절친은 끝까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말이 좀 달라졌다. 회사가 가라고 하면 올해든 내년이든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어쩔 수 없이 보는 면접이지만 회사의 결정을 기다려보자고 했다. 면접을 보고 나와서는 마음에도 없다면서 면접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자꾸만 물었다.

 
얼마 후 실장이 상사 K. 참을 수 없는 팀장. 그리고 면접을 본 우리 둘을 동시에 불러서 결과 발표를 했다.

실장: 000님(절친)이 가기로 했습니다. 아쉽지만 OOO님(나)은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가시죠.
상사 K: 그래, OO(나)이는 나랑 이야기 좀 더 해보고 나중에 가자.
절친: 저 부탁 하나 드릴게요. 내년엔 OOO님(나)이 갈 수 있도록 고과 잘 챙겨 주세요.

귀를 의심했다. 실장, 상사 K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팀장에게 로비를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가고 싶지도 않았던 면접을 보고 패배자가 되는 순간 실로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히 나는 신랑이 동행하지 않으면 갈 생각이 없다고, 파견에 대한 내 뜻을 충분히 비췄다고 생각했는데, 내 말을 듣긴 들은 건가? 좋은 언니 놀이를 하고 싶었나 본데 저 내용이 굳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청했어야 할 내용인가 싶었다.


생각할수록 일련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며칠 후 데면데면한 나에게 절친은 티타임을 요청했고, 사실 내가 간다고 한 적도 없는데 네가 마치 내가 가는 것처럼 상반기 내내 판을 짜놓아 다른 팀원들 보기 민망하다고 했다. 자기가 생각이 짧았다고 미안하다고 하며 팀원들한테 자기가 잘 이야기해 보겠다고 하는데 진짜 조금의 배려도 없어 보였다. 뭘 어떻게 이야기하겠다는 건지 시켜볼 걸 그랬나 싶지만, 더 민망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는데 면접 전에 진짜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냐고 물었으나 진짜 가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고 끝끝내 거짓을 말했다.
 
그 대화를 하고도 우린 한참을 데면데면 지내다, 막상 미국 파견을 가기 전엔 내가 퇴사로 마음이 많이 기운 상황이라 끝이 좋은 게 좋다는 생각에 12년의 관계를 풀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오늘 후배가 물었다.
“000님(그 언니)은 애도 있는데 어떻게 글로벌 파견을 가실 생각을 하신 거예요? 회사에서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시는 거예요?”라고. 뭐라고 답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회사에서 강제한 건 없어요. 스스로 지원해서 발탁된 거예요. 자세한 건 000님에게 물어봐요”라고 답했다. 답하면서도, 내가 왜 이 답을 하고 있나 싶어서 스스로도 웃퍼서, 내가 그 후배가 묻더라라는 말을 전했더니 대뜸 절친이 1초의 고민도 없이 “애 교육 때문에 가는 거지. 나 다른 애한테도 그렇게 말했어”라고 하는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애 교육 때문이면 진작에 마음 좀 알아차리지 그랬어”가 절친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내 절친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인지부조화를 위해 정신승리를 한 절친을 보며 사람이니깐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12년 동안 제일 친하다고 믿었던 절친에게서 겨우 그 정도 존재였음을 자각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1년간 절친이 글로벌 파견을 준비하면서, 팀원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나한테 공치사를 하면서, 마지막 면접까지 보여줬던 그 모든 행동과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심리학을 배웠지만, 심리학 이상의 인내와 이해와 나름의 분석이 필요한 난제였다.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공론화하면서까지 절친에게 기회를 넘겨 놓고, 막상 절친이 기회를 갖는 건 싫어 마지막에 욕심을 내고도, 그 절친이 본인이 가는 길이 더 빛나도록 백업을 세우고, 미안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인지부조화의 괴로움을 덮으려 어쩔 수 없이 가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꼴을 보니 또 한 번 내가 밉다. 엄마가 말한 것처럼 헛똑똑이. 사람 보는 눈 없는 바보천치.


한 때는 조용하게 강단 있는 모습이 참 좋았던 언니였는데, 요새 유독 명품에 집착하면서 옷을 좀 사라, 가방 하나 좋은 거 사라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차라, 인생 쭉정이를 걸렀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동안 쭉정이를 거를 기회가 두어 번 더 있었음에도 정이라는 단어에 이끌린 내가 끝끝내 끝을 이렇게 보고야 말았다.

 

직장생활을 끝내고 다시는 조직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에 더하여, 내가 12년 동안 가장 의지했던 관계에도 원치 않았던 마침표가 찍혔다. 아니 찍었다.
 




절친이 파견 전 마지막 근무일에 부서 인사를 돌았다. 나한테는 인사하지 않길 내심 바랐는데 내 자리에 와서 이제 간다고 했고, 나는 할 말이 없는 차라 영영 내 인생에서 잘 가라는 짧고 굵은 내 마지막 끝인사를 했다.

“잘 가”
 
그게 끝이어야 했는데, 주말에 회사를 나왔는지 다음 주 출근을 하니 내 책상 위에 편지지와 선물이 있었다.

편지를 열어보니 역시 절친이었고 편지를 읽고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동안 많이 고마웠구…이 척박한 회사에서 늘 내편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어. 업무로도 친구로도 많이 의지했지. 그래서 지금 마음이 더 아픈 것 같아.
OO아. 미안해.
혹시 나 때문에 회사에서의 기억이 안 좋게 남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냥 항상 응원하는 마음으로 있을게. 뭘 해도 잘할 OOO님을 지지하며, 레퍼 체크 전화라도 잘 받을게(믿고 번호 넘겨)
건강하고 자신을 아끼며 잘 지내요.”


미안하다고 끝났으면 좋았을 편지에서 다시 한번 내가 겪었을 마음의 상처는 아랑곳없이 레퍼런스 체크를 언급한 그녀에게 어떤 모욕감도 안 주고 보낸 게 화가 났다. 이름을 불렀다가, 님을 붙였다가, 말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가. 고민 하나 없이 휘갈겨 쓴 편지에 레퍼체크를 언급하는 걸 보니 끝끝내 절친이 아닌 비즈니스 관계에서 본인이 돋보이게 할 조연이 필요했다 싶었다.


우리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000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보니 잘 적응했나 봐요”라고 했다. 누군가는 내 퇴사 소식을 그녀도 아냐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녀도 내 퇴사의 이유였다. 글로벌파견을 다녀온 후에 다시 마주치기는 누구보다 싫은, 끝까지 본인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상처 입혔는지 모르는 채 미국에 가자마자 페북을 재개한. 상사 K보다 더 많은 가스라이팅으로 내 직장생활을 손에 쥐고 흔들었던. 참을 수 없는 팀장처럼 처음부터 애정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애정을 듬뿍 줬기에 더 괴로운. 인생에 더 없었으면 하는 악연.


상사 K는 절친이 미국에서 돌아오면 한 번은 풀고 갈 관계이니 잘 매듭짓길 바란다고 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나를 더 괴롭힌다는 걸 알기에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 알지만, 굳이 더 스치고 싶지 않다. 더 오랜 시간이 흘러 설령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건 또 내 몫이니깐.


절친이 두고 간 편지는 퇴사하면서 버렸고, 뜯지 않은 선물은 부서 캐비닛에 그대로 넣어두었다. 본인 마음 편하자고 두고 간 그 편지와 선물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내 답장을 자각하길 바라는 마음과 뜯기도 싫은 선물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그렇다고 가져오기도 싫어서 고이 넣어두었다.




어느 날 골든구스를 사서 신고 출근한 날 메신저로 “나 골든구스 샀어. 내 생에 제일 비싼 신발. 근데 OO이 운동화 오늘 보니 샤넬이더라.” 하면서 후배의 샤넬 운동화와 비교해 온전히 골든구스만큼의 값을 치르고도 그 값어치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절친의 풀 죽은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내 절친이었던 사람이 이 글을 우연히 보고 그때 왜 그랬을까 자책하길 원치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믿음도 없고. 하지만 그저 골든구스를 샀으면 그거 하나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으면 좋겠다. 비싼 값을 치르고도 내 소소한 행복을 불행과 맞바꾸는 비교를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이 그녀에 대한 내 마지막 우정이다.


“퇴근시간이면 신나 하던 내 콧노래는 너 때문에 어느새 사라졌었어. 나는 요새 다시 가끔 콧노래를 불러. 본인이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다른 사람들이 너 안 좋게 볼까 봐 이야기한다는 네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니 이제 좀 자유로워서. 다른 이의 콧노래에 반응하지 않는 너를 보면서, 유독 나만 만만했나 싶었었어.

OO아, 언니라고 부른 12년이 아까워 나도 마지막엔 네 이름이나마 편히 불러볼게. 제발 남들이 뭘 사든, 뭘 입든 관심 갖기보다 네 마음에 뭐가 들었는지 관심 갖는 사람이길 바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린 우연이라도 다신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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