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나 May 29. 2023

퇴사는 충동적이어야 했다.

퇴사를 너무 오래 가슴에 품었나 보다.


2022.12.14


지난 9월 타회사 사람들을 대상으로 업무 노하우를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고, 업무 노하우라 말하기엔 너무 변변치 않은 발표였지만, 여기저기서 꽤나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상사 K는 다음 날 발표 자료가 아깝지 않냐면서 월간회의에서 다시 한번 발표를 제안했다. 발표자료는 아깝지 않으니 발표는 안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건만 묵살되었고, 나는 첫 발표 때의 열정은 사그라진 채로 그 발표를 대충 하기는 했다.


오늘 하반기 결산회의가 있었고, 그 발표 덕분에 50만원 상품권을 받았다. 내용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발표를 한 사람이 워낙 적기에 내가 받을 수 있었다. 상품권을 받고 소감을 말해야 하는데,

“굳이 원치 않는 자리에 세워주신 상사 K님 덕분에 제가 꾸역꾸역 발표를 하고 이 상금도 받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K님께 상품권의 일부로 소정의 답례를 하겠습니다.”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K님 덕분에 제가 발표를 하고 상금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했어도 될 일을 꾸역꾸역! 억지로!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소감은 끝났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소감이 생각났다. 퇴사를 앞두고 있으면서 상품권을 받는 내가 얌체처럼 느껴졌고, 구태여 다크하게 소감을 전달한 나의 옹졸함에 화가 났다.




그 발표는 타 회사 차장님이 제안을 해주셔서 준비한 발표였다. 사실 참을 수 없는 팀장에게 적당히 발표를 넘길까도 생각했는데, 그 차장님이 “부장님이 하시는 발표가 듣고 싶습니다.”라고 해서 직접 준비하게 되었고, 발표를 하기 직전까지도 별 거 없는 노하우 같아서 많이 작아졌었다. 하지만 발표가 끝나고 몇몇 분이 “일을 이렇게 할 수도 있군요. 관점을 달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주어진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일을 개척해 봐야겠습니다.”등의 피드백을 주셨다. 퇴사를 결심하고 그 발표를 했던 게 사실 많은 위안이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의 직장생활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 같아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했다.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도 좋아한다. 나는 대체로 일을 할 땐 즐거웠다.

동료 C는 애사심 넘치게 일을 좋아하니 “(내가 하는 일을 넣어) OO쟁이”라고 했고, 거래처 분들은 “부장님, 일 좋아하시잖아요”라고 수시로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워라밸을 잘 지키는, 일보다는 나 자신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볼수록 내가 그들에게 보인 모습은 누가 봐도 일에 애정이 뚝뚝 묻어나 보이게 일을 했다. 


이력서 한 줄 한 줄 업데이트하듯 업무 노하우랍시고 PPT에 그동안 해왔던 일을 예쁘게 정리하고 보니 일에서 서서히 멀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 재미난 일도 많고, 더 해낼 수 있는 일도 많겠지만, 발표가 끝나고 나니 이만하면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나름 의미가 있었던 그 발표를 상사 K가 사내에서도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고, 거기에 곧 퇴사할 나에게 살림 밑천도 보태주셨건만 왜 고마움이 없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역시 퇴사는 마음먹은 직후였어야 했다. 연말이라 어수선했고, 고과가 나오기 직전이라 폭풍전야 같았고, 일은 일대로 손에서 멀어지고 있었지만, 인센티브를 한 달 앞두고 지금 퇴사를 지르기는 아까워 더더욱 다크해지고 있었다. 나를 이해하기엔, 오늘은 내가 너무 미운 하루다.


이제 막 입사한 후배들이 나의 퇴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써 밝은 척을 하고 있는데, 이 어두운 기운이 어찌 티가 안 날까 싶다. 내 밝았던 기운이 영영 꺼져 버리기 전에 내 마음이 한 발짝 더 ‘퇴사’로 기울었다.





저 발표를 하고 한참 후에 타 회사 과장님이 “저런 분이 팀장님이면 좋았겠어요. 배울 게 많으니”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 번도 앉아 본 적 없는 자리지만, 누군가의 말속에 잠시나마 팀장이었음에 감사한다. 


발표를 제안 주신 타 회사 차장님이 얼마 전에도 연락을 주셨다. 잊지 않고 밥 한 번 먹자고 연락을 주신 것만도 이미 고마운데, “부장님 재취업 원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알아볼게요”라고 하셨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이미 내일 갈 곳이 정해진 것처럼 든든했다. 


“차장님 덕분에 제 퇴사가 얼마 간은 더 미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발표를 권해 주셔서 진짜 감사했습니다.”


퇴사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부장님 일 좋아하시잖아요. 조금 재충전하시고 다시 돌아오세요.”였다. 하지만 돌아갈 마음은 없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은 맞았지만, 벗어나고 보니 그 일이 인생에서 제일 재미있고, 제일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분들이 보내 주신 응원이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열정 하나는 뒤지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줄 것 같다.  


“너무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이 전부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