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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May 25. 2023

사람이 전부였다.

눈물이 차오르고 차오른 날


2022.11.30


워크숍이 끝나고 상사 K가 임원이 된 게 다 후배들 덕이라며 내 회사생활 통 들어 오늘 드디어 개인 카드를 꺼냈다. 양껏 소고기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소고기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상사 K가 강권하는 폭탄주를 연달아 먹고 내 워치는 움직임이 없는데 심박수가 높다고 알림을 자꾸만 보냈다. 거하게 취해 회식은 즐기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와 거실에 잠시 누웠는데, 어설프게 취한 술이 깨고 나니 이내 감성에 취했다.


퇴사의 이유를 적다 보니 하나 같이 다 별로였다. 무엇 하나 좋았단 이야기가 없는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일이지 어떻게 12년을 참고 다녔나 싶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직생활에 안 맞는 사람임에도 불구 12년을 다니게 한 건 팔 할이 사람이었다.


대기업 명함도 좋고, 각종 사치도 좋았다지만, 사람이 제일 좋았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만난 사람이 다 좋았던 건 아니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분에 넘치도록 많았다.

우스개로 친한 언니들이 “얘보다 선배여서 다행이야”, “얘랑 같은 편이라 다행이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어찌 보면 후배였으면 고달팠을 거란 이야기, 다른 편이었다면 골 아팠을 거란 이야기인데 그런 애를 12년 동안 품어준 사람들이 내가 곧 그만둘 회사에서 얻은 보물들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신랑이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목이 묵직하게 아파질 정도로 울고 난 다음 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고…마…워…서…”


(신랑의 표정) 잉?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 나보다 더 퇴사가 고플, 억울하고 서러움이 묻어 있는 언니지만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 언니인에도 언니 아닌 언니인 C.

퇴사의 가장 큰 이유를 물어온, 선배여서 다행이라고 하는 언니 K.

나의 안위를 누구보다 먼저 걱정해 주며 나를 지지해 주는 동갑내기 친구 S.

게으른 나에게 귀감이 되는 자기 성찰이 몸에 밴 언니 같은 동갑내기 친구 J.

고분고분함 없이 언제나 돌직구를 날려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상사 K.

본인도 날카로우면서 나한테 말로 찔리는 게 아프다고 나를 선인장이라고 칭하는 나에겐 유머러스한 예전 팀장님 L.

너무도 이해가 안 돼 멀리하다가 MBTI를 보고 이해하게 된 언니 C.

나 같은 선배를 생전에 만나본 적 없다는데도 내 방식으로 애껴 괴로웠을 후배 N.

근무지는 달라졌지만 늘 나를 재밌어해 주며, 중요한 대소사는 연락을 주고받는 K.

어느 여름 내가 준 복숭아가 생각난다는 통통 튀는 동생 Y.  

아직도 더 배울 게 많은, 후배지만 직장생활은 OO처럼을 만든 C.

잠시 쉬어 가도 괜찮다고 내 등을 토닥여주는 엄마 같은 언니 L.

저출산이 걱정된다고 우회해서 나의 임신을 응원해 주는 K.

이외에도 다른 팀이 되어 가는 길은 달라졌지만 언제든 서로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인연들.

같은 곳에서 일하다가 이직을 했지만 여전히 연결된 사람들.

그리고 회사 밖 인연이지만, 많은 영감을 주신 인연들까지 모두 이 회사를 매개로 엮어진 고리들이었다.


미워한 시간도 있었을 건데 진짜 끝이 나나보다 싶다. 고마운 마음에 30분을 넘게 쉴 새 없이 눈물을 뿜어내며, 꺼이꺼이 토해내며 울었다. 이런 감정에 쉽게 동요하지 않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걱정 어린 눈빛이 교차하는 신랑을 보면서.


실컷 울고 마음속으로 되뇐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독한 이미지를 얻은 나는 실은 눈물이 많아서, 상사 K에게 “퇴사하겠습니다” 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흐를까 걱정이 되기에 퇴사 면담할 때 절대 울지 말자고 되뇌고 또 되뇐다.


‘마음속 응어리는 퇴사 일기에 다 털어내고, 상사 K랑 면담할 때는 웃으며 응원해 달라고 하자.’


오늘의 결론은 퇴사가 아닌, 나를 품어준 사람들에 대해 ‘무한 감사’뿐이다.

퇴사하면 다 끊어내고 싶었던 이곳에 아직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많다.




나는 이 일기 이후로도 수십 번도 더 울었다. 결론을 바꾸지 못한 눈물이었지만, 어느 날은 사람이 아쉬워서, 어느 날은 손에서 놓아낼 내 일에 미련이 남아서, 어느 날은 있을 때 좀 다르게 지내볼걸 하는 후회가 남아서.


그렇게 울고 울다 보니 끝이 나 있었지만, 한 번은 흘렸어야 하는 눈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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