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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May 22. 2023

나만 유독 숨이 막히는 이곳

퇴사의 이유 4)


2022.11.24


10월 초 실장과의 면담이 떠오른다.

“저는 윤석열을 찍지 않았습니다. 근데 자기들이 찍어 놓고 5, 6개월 만에 지지율 20~30 프로면, 우리나라 국민성에 문제 있지 않나”라고 반말로 슬쩍 나를 떠봤다. 주변에 찍었다는 사람이 없는데 도대체 누가 찍은 건지, 진짜 안 찍으셨나 묻고 싶었지만, 어려운 말씀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했다.


그즈음 참을 수 없는 팀장에게 우리가 준 리더십 평가 점수가 회사에서 역대급으로 낮은 점수였기에 우리를 탓하는 말이란 걸 알면서도 진짜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는 거다. 대통령이야 우리가 직접 투표하지만, 동의도 없이 그냥 앉힌 팀장을 거기에 왜 비유하는지.

그리고 뽑을 때 뽑았다 쳐도, 못하면 채찍질도 하는 거지. 내가 뽑았다는 이유로 그냥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으란 건가?


조직문화 점수가 곧 민심인데, 조직문화 점수가 왜 낮은지는 고민 없이 적당히 회유하면 개, 돼지들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따라와야 하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는 실장이 이끄는 이 조직에 염증이 났다. 조직문화는 조직장의 색깔이라고 말한 C의 말처럼, 아무리 팀원들 앉혀 놓고 조직문화 개선방안을 도출하라고 한들 그 위에 앉아 있는 조직장들이 바뀌지 않는 한 조직문화는 개선되지 않는다.


이 조직을 떠난 이들도, 아직 머물고 있는 이들도 우리 조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실장의 리더십이라고 입을 모은다. 퇴사자들은 끝이 좋은 게 좋다고 어느 누구도 우리 조직의 문제점을 실장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긴 누가 면전에 “네가 제일 문제야”라고 할 수 있겠냐마는 다들 “여기도 좋지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져서 갑니다.”라고 멋있게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끝을 맺었다.


갈 곳을 정하지 않은 나에게 “왜 나가시는 거예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슨 답을 해야 할까? 조직이 생각보다 답답했다는 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말한다고 달라질까 싶기도.


실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중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문제의 본질을 당사자에게 묻지 않고 들리는 소문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거라는 거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지 않고 주변인들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그렇게 나온 말들은 이내 기정사실이 되었다. 충분히 왜곡될 수 있는 이야기로 그 사람을 정의 내리는 그 결론이 너무 위험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확인은 없었다.


글로벌 파견에서 내가 떨어진 이유는 “누가 글로벌 파견 갑니다.” 했을 때 내가 “아~ 그 사람 갈만하지요” 점수가 파견을 가게 된 그 여자보다 조금 낮았다 했다.    

그 사람 갈만하지요 점수는 실장 귀에 그 사람이 만든 트러블이 들렸는지 아니었는지 점수였고, 귀에 들어간 그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나에게 전혀 묻지 않았다. 어느 날 그저 상사 K에게 전화해 “OOO님(나)이 다른 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는데 잘 좀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전달되었을 뿐. 상사 K는 나를 믿는다고 했지만, 구태여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금 조심하자고 했다. 나 때문에 힘들었다면 그 후배는 그 후배의 퇴사저녁 자리에 나를 초대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때론 직장생활에 오해도 있을 수 있고, 의도한 바랑 다르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도 체득한 이후 건만, 타인에 대한 생각을 조직장에 옮기는 사람이나 그걸 전적으로 신뢰하는 조직장이 있는 이 조직은 유독 숨이 막혔다. 누군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가 실장 귀에 속삭일 것만 같았다.


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쩌면 실장 귀에 그 어떤 소리도 들어가지 않게 쥐 죽은 듯 다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병도 주고 약도 준다고. 잠시나마 내가 뭘 진짜 좋아하는지 알게 해 준 이도 실장이었다. 삼청동의 임대딱지를 본 이후 나는 회사에 다시 적응해야 했는데, 적응하기로 한 이상 재미를 찾아야 했다. 일에서든 무엇에서든.


그즈음 상사 K가 Digital Transformation에 꽂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할 필요성에 대해 설파하며 신문물에 대한 학습을 강요했다. 아날로그인간에게 디지털 학습은 꽤나 어려운 과제였고, 그 신문물에 대한 유튜브 강의를 틀어 놓고 재택을 하던 중 점점 더 신문물에 빠져들었다. 신문물이 곧 아이디어로 이어졌고 나는 상사 K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회사의 신사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이 아이디어를 내보고 싶다고 했다. 상사 K는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해 주면서 실장에게 귀띔하자고 했다. 일은 어찌어찌 커졌고, 실장은 나에게 아이디어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고 오큘러스를 주었다. 그 뒤로도 아이디어 공모전이 있을 때마다 아이디어를 내자고 나를 부추기기도 했다.

어느 날 상사 K는 “네가 할 일이 아닌데, 실장님이 너한테 너무 큰 짐을 주신다. 이제 그만하고 네 일 해. 내가 잘 말씀드려 볼게”라고 했지만, 사실 잠깐이지만 아이디어를 생각할 때 행복했고, 머릿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꿈꾸는 건 너무나 재미났다.


나는 그 뒤로 사내 네이밍 공모전에 아이디어를 두어 번 더 냈다. 잠시나마 외도를 하는 기분으로 그 순간은 설렜다. 실장의 관심은 부담이었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회사 일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잠깐이나마 아이디어 생각할 때 재밌잖아요?”를 부정하고 싶지만, 진짜 그랬다. 잠시나마 그런 순간순간 나는 퇴사 생각은 잊었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거듭 권하며 술 없는 인생이 얼마나 지루하냐고 안타까워하는 그에게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술 하나만 아시니 안타깝습니다”라고 따라주는 술잔을 마다하는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너무 외롭습니다”라고 말한 그에게 “사람은 본디 외로운 법입니다”라고 말하며 씩 웃어 보이는 내가,


“OOO님은 MZ도 아닌데 공정 운운합니까?”라는 그에게 “제가 Z는 아니어도 M은 맞습니다. 공정 좀 운운하겠습니다”하는 내가 예뻤을 리 없다.


늘 미운 쪽을 택한 나에게 길은 정해져 있었다.


적당히 아첨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가며 해 드리라는 엄마 말씀이 조직생활을 편히 해준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럴 수 없는 천덕꾸러기다. 그래서 오늘의 답도 역시 ‘퇴사’다.






이 일기를 쓰고 약 두 달 후 실장은 모든 팀이 섞어 앉자는 제안을 했고, 팀별로 투표를 해보라고 했다. 거의 반대하는 분위기라는 의견을 전달했으나 해보지도 않고 반대한다면서 밀어붙였다. 애초에 투표 없이 강행했으면 카리스마라도 있는 리더였을텐데, 그런 제안을 하면 그 속내를 알아차리고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해 주기를 바라는 실장의 그 속내를 우리는 알면서도 모두 외면했다.


그의 리더십은 리더십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않은 내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것이란 걸 안다. 리더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도.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는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 않지만 권위 앞에 알아서 고개 숙여 주기를 바라는 지나친 이상주의자인 거 같다.


퇴사를 앞두고 실장에게 받은 오큘러스 반납을 하면서 이직을 하지 않는 나에게 실장은 사업을 할 계획이냐고 물으며 잘할 것 같다고 응원해 주었다. 본인도 사업이 하고 싶지만, 아직 용기가 없다고.


사업은 생각에 없지만, 잘할 것 같다는 그의 응원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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