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팀장님의 신년인사와 퇴사 응원
2023.2.17
퇴사 통보를 하고 매일 조금씩 이메일을 정리 중이다. 잘 버리지 못하는 내가 아웃룩을 쓰면서까지 입사한 날부터 차곡차곡 모은 12년 간의 이메일을 조금씩 비워내다 보니 문득 예전 팀장님이 보내신 메일에 생각이 머물렀다.
2013년 신년인사 메일
신년 메시지를 받았는데 “무지개 같은 한 해 되세여”가 어찌 된 일인지 “무지 개같은 한 해 되세여”로 왔다로 시작하는 메일은 취저였다. 무지 개같은 한 해라!
그리고 이어지는 성공에 대한 내용.
성공이란 무엇인가
1.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2.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3. 정직한 비평가로부터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4.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것
5.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6.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하나의 다른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팀원 여러분 올 한 해 웃음, 행복, 행운, 대박, 영광, 사랑 뭐 이런 것들로 가득한 한 해 되시고,
활력과 아이디어 넘치는 팀이 되었으면 좋겠다로 끝나는 메일.
모두가 어려워하신 팀장님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실장님 보다 높았던 부사장님급 임원. 엄마보다 한 살 어린 팀장님은 사실 어려운 분이어야 맞지만, 난 팀장님이 무서우면서도, 한 마디씩 던지는 농담이 즐거웠다. 엄근진의 아이콘이신 팀장님도 엘베 앞에서 실없이 던지는 내 농담에는 한 번씩 웃어 보이셨다.
그런 내가 팀장님 생신 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생신 축하 메일을 보내면서 말미에 “늘 건강하십시오. 영원한 캡틴”이라고 써 둔 메일도 찾았다. 팀장님을 진짜 좋아했나 보다. 지금은 한껏 낯간지러운 그 인사를 말미에 붙인 내가 낯설면서, 지난 10년간 내가 잃은 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그 시절이 그리웠다.
마지막으로 팀장님을 뵌 건 2018년 가을 어느 날. 여느 임원들처럼 은밀한 전화 한 통을 받고 작은 회의실에 우리를 불러 짧고 담담히 끝인사를 건네셨고, 작은 회의실에 모인 우리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도 나는 가끔 연락을 드렸다. 축의금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결혼을 한다고 연락을 취했을 때도 축하인사와 함께 축의금을 두둑이도 보내주셨었다. 결혼 전에 찾아뵙고 싶었지만, 코로나로 자유롭지 못하던 때라 결국 뵙지 못하고 그 해 말에 안부 인사를 건넸을 때,
“1년 내내 한겨울 같았던 한 해, 모두가 힘들었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2021년 새해가 되네요. OO님도 천생연분인 그분과 함께 유쾌, 통쾌, 상쾌한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혹시 OO님 트롯오디션에 나올 것 같아 모든 트롯 오디션을 빠짐없이 봤죠. 내년에 한 번 나와 봐요”라는 답이 왔다.
나는 노래방을 가면 트로트를 불렀었다. 사회생활 꽝인 내가 상사들 눈에 잘 들기 위해서라기보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독 트롯을 좋아해서, 18번은 십오야, 사랑밖에 난 몰라, 얄미운 사람, 당돌한 여자? 그중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십오야다. 그걸 기억하고 미스트롯을 제안하고 계신 팀장님 문자를 받고 한 동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매년 한 두 차례 톡을 드렸는데, 그때마다 “재치가 그립다”, “한방의 유머센스가 더욱더 빛나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고 답을 주셨다.
팀장님이 보내신 그 메일의 성공한 인생에는 돈도, 명예도, 우리가 흔히 집착하는 그 어떤 사회적 맥락의 성공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의 40년은 성공한 인생에 해당하는지 하나하나 음미하며 V체크를 했다.
아. 어느 것 하나 자신 있는 조건이 없었다.
문득 팀장님은 성공한 인생을 살고 계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을 하고 왔다.
다른 팀으로 갈 생각도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자리에 돌아오니 속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진짜 끝이었다. 화장실 작은 한 칸에서 복잡 미묘하고 얽히고설킨 눈물을 한바탕 요란하게 쏟아내고 자리로 돌아와 신랑에게 그 감정을 전했더니 신랑이 “12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톡을 보내왔다.
에잇. 다 울고 왔는데 다시 눈물 나잖아!!!!!
퇴사를 코 앞에 두고 팀장님께 장문의 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잘 지내시는지요?
너무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문득문득 호시절이 그리운 순간에, 팀장님의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그리운 순간에, 자주 그리워하고 있음에도 자주 연락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퇴사를 앞두고, 메일을 정리하던 중에 팀장님이 2013년 초에 보내신 새해인사 메일을 발견했습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_(2013년 팀장님 메일 인용)
팀장님은 성공한 인생을 살고 계신지요.
어느 날 문득 너무 불행하단 생각으로 퇴사 결심을 하고 저 메일을 보니 더더욱 성공한 인생을 위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정비해야겠단 생각이 공고해졌습니다.
이곳을 떠나며 가장 좋았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 누군가의 질문에 제 대답은 2015-2018년이었습니다. 리더십이란 리더의 자리에 오르면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걸 팀장님 이후에 너무도 많이 보았기에, 그 시절이, 그 리더십이, 그때의 우리 팀이 많이 그리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밤에 쓰는 편지 같은 톡을 한낮에 잘도 보냈다. 그리고 팀장님은 20여분 뒤 바로 답장을 주셨다.
산천을 헤집고 다니기 좋은 시절이라 운전하여 산골 이동 중에 잠시 차를 멈추었는데 반갑게도 OO님 소식이...무지 반갑고요. 회사를 떠나 새로운 인생의 맛을 보겠다는 소식은 더 반갑네요. 아니다 싶으면 떠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기회를 잡아 더욱 비상할 것입니다. 앉아서 더 큰 성장의 기회를 잡을 수는 없으니 찾아 떠나야 합니다. 뒤 차들이 빵빵대서 저도 떠납니다. 건강은 항상 잘 챙기시고요.
응원. 어른의 응원. 역시나 성공이 아니라 성장을 응원해 주시는 참 어른의 응원.
편히 말씀하실 법도 한데, 항상 깍듯하신 응원.
팀장님이 떠나신 이후, 그리고 내가 존경하던 참 어른이 스스로 떠나신 이후, 어른의 응원이 몹시도 그리웠었나 보다.
감사합니다. 그 어떤 응원보다,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습니다^^ 역시나 영원한 캡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