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나 Jun 29. 2023

이제 직업은 퇴사원입니다.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게 될까?



2023.03.03


10일 정도 퇴사여행을 다녀왔다.

늘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출근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여행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모드 전환에 급급했었다. 그게 싫어서 이번 여행은 짐도 천천히 풀고, 짐 풀다가 다시 그때 생각이 나면 사진첩도 뒤적이고, 그래서 또 기억나는 에피소드들을 글로 옮기리라 다짐했는데, 이번에도 도착하자마자 짐을 후다닥 풀었으며, 사진첩은 볼 여유도 없이 10일간 긴 꿈을 꾸었나 싶게 여행은 이미 아련해져 버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집에 있어야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건지 출근을 하는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출근을 하고 나니 상사 K가 퇴사여행에서 혹시나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티타임을 제안했다. 내가 어떤 단단한 마음으로 퇴사를 밀어붙이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하셨고, 동반 퇴사를 하는데 불안하지 않느냐고도 물으셨다. 차라리 이직이면 나았겠다고, 이렇게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나가는 거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 같다고도 하셨다. 용기가 부럽다고도 하셨고, “내가 너만큼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구나”하고 패배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너는 스타트업에나 어울렸을 거라고, 라떼는 그러지 않았는데 너는 참 겁이 없다고, 너처럼 회사를 다녔어야 했다고도 하셨다.

 

거기까지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상사의 지위에서 다시 한번 조언을 하셨다. 본인은 오래 봐왔기에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좀 더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는 말투로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라고 하며, 참을 수 없는 팀장과, 미국에 간 비즈니스 절친도 인생에 큰 교훈일 거라고 훈내를 유발하고자 던지는 진부함까지 보탰다.


그냥 고생했다고, 단단한 마음이 부서지지 않고 쭈욱 꿈꾸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응원해 주셨으면 어땠을까? 보탤 수 있는 다른 말들도 많았을 건데, 그는 소임을 다한 표정인데 나는 끝까지 그가 말해준 단어 하나하나 조사 하나까지 아쉬웠다.


숱하게 지적당한 태도.

직장생활 12년 동안 태도 지적을 한 사람은 상사 K, 실장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팀장 세 사람이다.


사람이 말을 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일 많았다. 찔렸다. 태도 지적을 한 세 사람 모두, 아무 때고 본일들 편할 때 내 자리에 와서 말을 걸면 바쁠 땐, 아니 바쁜 척을 하고 싶을 땐, 아니 쳐다도 보고 싶지 않을 땐 바쁜 척을 하며 모니터만 응시했다. 미국에 간 그녀는 직장상사가 옆에 와서 말을 걸면 일어나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했다. 상사 K는 눈을 맞추라고 했다가 어느 날은 부담스럽다고 시선을 돌리라고 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들에게는 꽝이었다. 참을 수 없는 팀장이 그거 사람 무시하는 거라고 대놓고 이야기했을 때는 사실 너무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었었다. 들킨 것도 부끄러웠지만 아무리 미워하는 마음이더라도 왜 그렇게 기본도 안 된 태도로 사람을 대했을까 하는 자책도 있었다. 물론 그 지적 이후에도 실장이 다가와 말을 건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참을 수 없는 팀장이 와서 말을 걸 때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건 아니었다. 이미 그렇게 정립된 그들과 나의 관계는 그즈음 어딘가에서 읽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정도로 남을 대하라”에 꽂혀 그냥 그렇게 둘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너무나 당연했다.

  

가뜩이나 실패한 직장생활에 누군가는 오해도 했을 거라는 그의 조언이 사표는 내가 냈지만, 사실은 쫓겨나는 기분이었다.


평소 성격답게 나도 한 번 당돌해볼까 하다가 이내 접었다. 갈 곳도 정하지 않고 쫓겨나는 기분으로 낸 사표에 일말의 책임감을 깊이 통감하시고, 리더의 덕목이 무엇인지 책도 많이 보시고, 임원이라는 직의 자리지킴보다 진심으로 후배들에게 무엇을 내어줄 수 있는지 선배다운 고민을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잠시 머금었다가 그냥 삼켰다. 그건 내 머릿속 이상적인 임원일뿐, 사실 어떤 리더가 훌륭한 리더인지 답을 몰랐다.


나도 결국 상사 K에게 상사 K가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고 싶었던 거다. 우리가 응원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그거 하나만 고치면 더 잘 될 거라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작별인사. 이미 우리가 가진 훌륭하고 소중한 것을 칭찬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거에 아쉬워하는 우리 성격이 묻어나는 작별인사.


그리고는 별 거 해준 게 없는 7-8년 전에 퇴사한 그녀가 아직도 한 번씩 연락을 해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신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읽은 것 같기에 그의 눈높이에 맞춰 “성공하면 연락드릴게요”라고 했다.

그는 “성공하지 않아도 연락하며 살자”고 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면담을 다시 한번 더 했다. 이번 면담의 끝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잠깐 화가 났다가 이내 우리다워 웃음도 나왔다.


어제 귀국 편 비행기에서 세관신고서를 작성할 때, 직업란에 ‘회사원’을 적었다.

한껏 휘갈긴 회사원을 보고 신랑이 “퇴사원? 벌써 퇴사원이라고 적은 거야?”


“직업에 퇴사원도 있냐!!!!!!!!!!!!!!!!”


퇴사 일정을 조율하고 나온 터라 생각이 더 많아졌다.

직업이 회사원인 것도 퇴사원인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다들 세관신고서에 직업은 뭐라고 적나 궁금하기도 하고, 세관신고서에 직업은 왜 필요한가 궁금하기도 하고, 앞으론 입국할 때마다 직업을 자유롭게 바꿔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진짜 직업을 자랑스럽게 적는 날이 오는 날은 언젤까 싶기도 하고, 그때 직업은 뭘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랑자, 몽상가, 한량 이런 단어만 가득했다. 퇴사를 앞두고 마주한 ‘직업’이라는 두 글자가 유독 백수라는 사실이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꿈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으니 학생이라고 표현하라고 했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으니 지망생이라고 표현하라고 했다. 아예 거창하게 CEO, 정치인, 검사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직업도 적어보라고 했다. 관세청에서 뭐 그거 일일이 확인하겠냐고. 그러게;

 

직업으로 무엇을 판단하고자 한 걸까? 신고 품목에 있는 것들이 돈이 좀 두둑하게 있어 보이는 직업이면 관세 부과라도 좀 면해주나? 왜 세관신고서는 곧 퇴사자를 한 없이 쪼그라들게 만든 건지.


이번 달 월급은 나오겠지만,

나는 어제 심리적으로 먼저 백수가 됐다.





퇴사 일정을 조율하며 연차를 다 소진하는 게 유리할 거라는 그에게 그게 무슨 의미냐며 그냥 3월 말에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 입사일이 5월 2일이었다. 연차를 어찌어찌 잘 소진하면 퇴사일이 같아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하면 꼬박 12년을 채우고 퇴사하는 게 되어 완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상사 K에게 4월 한 달 내내 연차를 소진하겠다고 했다.


상사 K: 이직하니? 이직할 계획이니? 왜 12년을 꼬박 채워야 하는데?
나: 혹시 모르잖아요. 사람 일.
상사 K: 아... 뒷골...
나: 그냥 경력 12년이라고 말하기에 한 달이 비는 게 아쉬워서요.
상사 K: 그냥 올림 하는 거지. 그걸 꼭 완벽하게 채울 필요는 없잖아?
나: 그래도...
상사 K: 어차피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잖아. 잘 계산해 보고 그게 더 나으면 그렇게 해. 설마 안 되겠니?
나: 아... 그냥 안된다고 해주세요. 그럼 실업급여 신청하게!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나도 웃었다. 이런 대화도 이제 몇 번이나 남았을까?

그러면서 글로벌 파견 인제 누굴 보내냐고. 네가 갔어야 하는데 하셨다. 다음엔 네가 갈 거야도 아니고, 다른 쟁쟁한 경쟁자 없음 네가 갈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한껏 희망고문을 해 놓고, 마치 내가 뿌리치고 나가는 양.


나: 참을 수 없는 팀장 보내세요.
상사 K: 그럼 팀장은 누가 하고?
나: 미국에서 온 애 시키세요. 미국에서 오면 뭐라도 자리를 만들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상사 K: 너 나간다고 아주 막말한다?
나: 나가니깐 좋네요.


그리고 그 뒤로 내가 퇴사하는 바람에 본인 평가가 마이너스에서 시작된다는 푸념을 하는 상사 K에게, “어려운 거 해결하시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연초부터 파이팅 하세요. 이제 계약직이시니깐.” 했다. 그때도 나간다고 막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늘 나더러 부정적이라고 했다. 본인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타박하면서.

긍정은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라 어느 강연에서 들었다. 퇴사는 fact고 평가는 마이너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긍정하기를 속으로 되뇌며 참으로 시원했다.


행여 직장생활이 다시 하고 싶어져 취업을 원한다 해도, 채용담당자가 혹은 나를 채용하는 부서에서 이 글의 존재를 알면 채용취소를 통보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공이란 무엇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