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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Dec 13. 2023

일상으로의 소환


여행은 끝났고, 4개월 동안 넘치도록 일렁이던 설렘도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국가인 튀르키예에 도착한 신랑과 나는 진짜 동상이몽의 나날들로 각자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누군가는 드디어 스위트홈에 간다는 설렘으로, 누군가는 이제 황홀한 꿈에서 깰 시간이라는 울적함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오라는 말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나의 포부에 한 마디씩 보태 듯 새로운 영감도 꼭 많이 얻고 오라는 조언도 숱했건만, 긴 여행의 끝에 어떤 새로운 영감이나, 아니면 어떤 새로움 마음가짐이나 새로운 정신이 깃들었다든가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던 헛된 꿈도 여행의 끝에는 괜한 죄책감마저 일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저 내가 있던 자리로, 조용히 돌아왔을 뿐.


여행지에서 올렸던 "여행의 목적"에 관한 글에 친오빠가 "여행의 당위성을 한껏 포장한 글을 잘 읽었다"며 조소했다. 제아무리 포장했다 하더라도 정곡을 찌르는 그 말이 아팠는데, 사실이라 뭐라고 더 항변할 기운도 사라져 버리고, 그저 겸연쩍게 황망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이 끝날 때 진정 깨달았다. 일상을 벗어난 도피. 눈앞에 펼쳐진 당면한 과제들을 눈 질끈 감고 피해 보는 몽매함. 그렇기에 실로 단 한 번도 미래로 소환되지 않고 행복에 절여진 나날들을 보냈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숱하게 찍힌 순간의 황홀함이 핸드폰에 수만 장이 쌓이고, 기억은 사진을 들여다봐야 어렴풋이 내가 그곳에 있었구나 하는 아련한 기억을 불러올 뿐이고, 나는 그저 일상으로 내던져졌다. 여행지에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던 "그래서 여행 후에 뭐 먹고 살 건데?"의 걱정, 근심, 우울 한가운데로 다시 소환되고 만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시차는 사실 6시간 밖에 되지 않지만,

시차 적응을 핑계로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낮과 밤이 바뀐 일주일을 보낼 즈음, 엄마의 말이 아프다. "두 백수 요새 맨날 그냥 노냐?"


단어 하나하나가 구석구석 다 아프다. 부정할 단어가 단 하나도 없는 걸 떠나, 진짜 "그냥 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파서. 그래서 낮과 밤을 바꾸기 위한 대단한(나에게만 실로 대단한) "노오력"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그저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인 "연말 다이어리 사기"를 끝냈고, 오늘 받은 다이어리에 힘차게 내년의 계획을 몇 줄 끼적였다. 실은 길을 잃었기에 몇 줄 끼적이기도 힘들었지만, 시간 부자의 면모로 앞으로 다양하게 다이어리를 채워 넣겠다는 또 다른 맹랑한 자위를 하며 오늘도 참 씩씩하다.


여행기는 찬찬히 따로 글을 쓸 생각이지만, 그래서 여행의 끝난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기록하기 위해서 몇 자 적어봤다.


나는 생각보다 "지금, 여기"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여행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었고, 누군가에겐 다 똑같고 지긋지긋한 유럽을 4개월 내리 보고도 돌아오는 날까지도 카메라로 여기저기 담기를 여전히 좋아하고 여전히 설렐 수 있는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를 여전히 다 알지 못하지만, 나의 호불호를 좀 더 잘 가르마탈 수 있게 되었달까.


단 하루라도 집에 있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라 117일의 여정 중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나가지 않은 날이 없는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엉덩이가 일을 한다는데, 없는 재능에 앞을 막는 캄캄한 벽이 하나 높이 드리워진 기분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에서, 미래를 잃고 무지하게 살아온 나는 도처를 돌며 근현대사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한국사 공부를 하기로. 국사라면 학창 시절 수험을 위해 벼락치기로 공부한 기억뿐이고 그마저도 단발성 암기라 휘발되고 말았기에, 우리 역사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 애정이 단순히 애정 함에 그치지 않도록 나를 채찍질하는 수단으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아직은 마음먹은 단계로, 책도 주문 전이지만...). 내년 첫 시험이 2월 17일이다.


4개월간 쓸데없는 짐은 괜한 기우로 많이도 챙겼으면서, 무겁다는 이유로 단 한 권도 챙기지 않은 나는 역시 4개월간 익숙한 활자에서 밀려나있었고, 그 사이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책 읽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도 목격했다. 그러고는 "책 속에 파묻히자"라는 목표와 "다독이 아닌 변화를 이끌어내는 독서를 하자"라는 목표를 세웠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시작했고,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영문 독해를 하듯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어렵게 읽고 있다. 오늘 일어나 어제 밑줄 친 부분을 읽으니, 그 단어가 또 새롭다. 이 책을 다독해야 할 이유일 듯.


조금 불편한 상황을, 예기치 못한 광경을 나름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고 믿었는데, 어제 산책로 진입방향과 반대로 오는 사람들에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허나 다행인 것은, 나중엔 안내 표지판이 작았겠지, 역행할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 구청에 표지판 좀 잘 보이게 해달라고 할까? 하는 고무적인 생각으로 전환했다는 것? 아직도 갈 길이 있으니 이 또한 고무적인가?


가장 괄목할 부분은, 가족원을 늘리고 싶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는 거다. 어린아이(들)를 데리고 여행하는 부부를 참으로 많이 만났다. 고생스러워 보이는 순간이 대체로 더 많았지만, 여행지에서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여행을 끝냈고 여전히 둘이 사는 삶도 충분히 즐겁다는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다른 삶이 문득 궁금해졌다. 귀국하는 날 이제 여권은 필요 없다고 “나는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어"라고 말하는 신랑과 여행 한 달 만에 "다음 여행은 남미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나 사이에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무척 궁금한 심정이 된 건 헛된 공상일까. 진정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소소하게 한국에 오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이 중에선 가지치기할 것들도 있고, 진짜 일상이 되도록 만들어 보고 싶은 중요한 것들도 있다.

나 하기 나름이라, 진짜 하얀 도화지를 펼쳐 스케치할 시간이 된 거다.


여행의 설렘을 다른 어떤 것의 설렘으로 치환할 시간에 시차 적응이 웬 말이야.


이불 걷어차고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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