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생로랑의 50년 연인, 피에르 베르제
입생로랑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허물고,
패션의 혁명을 써내려 간 남자다.
그는 ‘르 스모킹’으로 여성의 몸을 해방시켰고
시스루 드레스로 사회를 도발했으며,
쿠튀르의 역사를 젠더리스로 뒤흔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입생로랑은 한 남자와 함께
그 모든 혁명을 견뎠다는 것이다.
‘피에르 베르제‘
입생로랑의 연인이자, 동반자이자,
끝끝내 그의 집이 되어준 사람
이 글은 그 두 남자의 사랑과 창조,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짜 아름다움에 대한 기록이다.
1930s–1950s
문학이 심어진 유년을 지나 예술을 만난 청춘, 피에르 베르제.
피에르 베르제는 1930년,
프랑스 서부의 섬 오레롱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은 어릴 적부터 책과 바이올린
그리고 낭만주의 문학으로 가득했다
아홉 살에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으며 문학의 구조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후 파리에서 장 콕토,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브르통, 장 지오노 등
당대의 사상가들과 가까이 지내며,
‘예술을 위한 실천’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품었다.
1950년대 초, 그는 당대의 떠오르던
표현주의 화가 베르나르 뷔페와 동거하며
예술 경영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베르나르의 예술세계를 진심으로 신뢰하며
그것을 세상에 내보이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 시기는 훗날 입생로랑을 만났을 때,
그가 어떻게 한 사람의 천재성과 상처를
돌보고 껴안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밑바탕이 되었다.
1954–1958
빛나는 소년 입생로랑, 파리로 오다
입생로랑은 1936년 알제리의 오랑에서 태어났다.
극장 체인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사교적이었던 어머니 덕분에 그는 어릴 적부터
파리 패션 매거진과 연극 무대에 빠져 살았다.
어머니는 드레스를 상당히 즐겨 입었는데,
어느 날 입생로랑이 어머니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울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종이 인형에 옷을 만들어 입히며 스타일을 익혀
열일곱의 나이에 International Woolmark Prize
콘테스트에서 수상하며 파리에 첫 발을 내딛는다.
보그 편집장 미셸 드 브룬호프는 그를 단박에 알아봐
1955년 크리스찬 디올에게 소개되며
이 천재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1957–1958
디올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시작
1957년 10월,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고,
장례식은 사실상 국가적 추모 행사가 되었다
그 해 11월, 디올 하우스는 고작 스물한 살이던
입생로랑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는 정식으로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이끌게 된 세계 최연소 수석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며칠 뒤,
생 로랑은 파리의 레스토랑 클로쉬 도르에서
열린 저녁 모임에서 피에르 베르제를 처음 만난다
당시 피에르는 화가 베르나르 뷔페의 파트너이자
매니저였으며, 문학계와 예술계를 넘나드는
지적 인물이었다.
피에르는 그 순간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내가 단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건 사랑이었다.”
이 만남은 단지 사적인 인연에 그치지 않았다.
이후 입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1961년, 함께 입 생 로랑 하우스를 설립하며
동반자의 삶을 시작했고,
그들의 관계는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예술, 경영, 삶을 관통 한 유례없는 파트너십으로
이어진다.
1960s
고통 속의 사랑, 그리고 마주 잡은 손
1960년, 생로랑은 알제리 내전 징집으로
군 복무에 끌려간다
군대는 그가 견딜 수 없는 폭력적 환경이었고
그는 끝내 정신이 무너진 채
파리의 발 드 그라스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병상에서 약물 치료와 전기 충격을 견디며,
삶의 가장 어두운 바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남은 건 오직 한 사람
피에르 베르제였다.
그는 곁을 지켰고, 함께 싸웠다
디올 하우스가 입생로랑을 버리자,
피에르 베르제는 입생로랑에게
“우리가 우리만의 오뜨 꾸뛰르 하우스를 만들자”
고 말했다. 이렇게 폐허 위에 세워진
사랑과 신념의 집.
Yves Saint Laurent라는 이름의
오뜨 꾸뛰르 하우스가 파리에 탄생했다.
1966
모로코, 색의 각성
그들은 모로모 마라케시에서 처음으로
빛과 색의 세계에 매혹된다.
그곳은 빛이 색을 깨우는 장소였고,
그들에게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 두 연인은 매해 여름과 겨울,
두 차례 마라케시를 찾아 컬렉션을 구상했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붉은 흙과 코발트블루,
핑크빛 벽, 황금빛 양탄자들이 번져있었다.
이후 그의 패션은 강렬한 색채로 말을 했고,
색은 빛의 기억을 담은 언어가 되었다.
이후 그들은 다르 엘 한슈(Dar el-Hanch),
다르 에 사아다(Dar Es Saada)를 거쳐
1980년에는 화가 자크 마조렐의 정원이 있던
자르뎅 마조렐(Jardin Majorelle)과 그 옆의
빌라 오아시스(Villa Oasis)를 매입해,
회복과 창조의 성소를 완성한다.
이들 공간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었다.
건축가 빌 윌리스가 꾸민 인테리어는
모로코 장인정신과 유럽 모더니즘이
만나는 교차점이었고,
이곳에서 생로랑은 거의 모든 컬렉션을 디자인했다.
피에르는 이 안식처를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곳”
이라 불렀다.
1966–2002
젠더의 경계를 깨고, 스타일은 전설이 되다.
1966년, 생로랑은 여성용 턱시도
‘르 스모킹(Le Smoking)’을 선보인다
이는 단순한 디자인 혁신이 아니라,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혁명적 행위였다
여성의 몸을 코르셋과 풀 스커트로 가리던 시대에,
생로랑은 날렵한 팬츠 수트와 매니시한
블랙 재킷을 내놓았다.
이는 젠더의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부수는 선언이었다.
“나는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을 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생로랑-
그 이후 시스루 셔츠, 시폰 드레스, 오스트리치 벨트,
그리고 1968년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서 선보인
완전히 투명한 이브닝 가운까지,
입생로랑은 '노출과 은폐'
'남성성과 여성성'
이 모든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중성적이었고,
그의 모델들은 그 시선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2008
마지막 인사, 영원한 집
2008년, 입생로랑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다.
피에르 베르제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만났던 파리의 아침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는가.
이브, 당신은 영광스러웠고,
그 영광은 한 번도 당신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제 당신의 유해는
우리가 사랑하던 정원의 흙으로 돌아가려 한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나는 당신을 경외했고, 존중했고, 사랑했다.”
입생로랑의 유해는
마조렐 정원의 대나무 숲 아래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에르 베르제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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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생로랑은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가 예술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끝까지 지켜준 한 사람,
피에르 베르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입생로랑의 집이었다
그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따뜻한 집.
때론 그의 나약함을 감싸 안고,
그의 삶을 존중하머
세상의 비판 앞에서 그를 밀어준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