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넷플릭스 〈애마〉에 대한 퀴어 인문학적 비평

당신은 자위와 여상위를 즐기는가?

by SPIT


당신은 자위와 여상위를 즐기는가?


자위는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한 쾌락의 행위이고, 여상 위는 관계 속 권력의 도식을 전복하는 자세다. 넷플릭스 〈애마〉에서 여성들이 말 위에 올라 광화문을 달리는 장면은 바로 이 두 행위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말타기자세는 여상위처럼, 아래와 위를 전도시키며 새로운 쾌락의 지형을 그린다.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주체로서의 몸을 드러내는 순간에서 작품은 시작된다.


시대적 맥락과 기술•산업적 병치, 그리고 생태계의 보존


1980년대 한국 영화계는 컬러 텔레비전 도입과 더불어 영화 검열 제도의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산업적 생태계를 형성했다. 넷플릭스 〈애마〉는 이러한 과거의 전환기를 2020년대 OTT 플랫폼 시대의 ‘홀드백 현상’과 병치시킨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콘텐츠의 생태계 전반을 어떻게 유지·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특히 OTT 플랫폼의 확산은 기존 영화관 중심의 유통 질서를 해체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독점 구조와 착취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애마〉의 재현은 단순히 산업의 변화를 기술하는 차원을 넘어, “문화 산업의 생태계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라는 과제를 드러낸다. 여기서 ‘살려낸다’는 것은 영화인·배우·창작자들의 권리 보장뿐 아니라, 다양한 욕망과 정체성이 표현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서사적 환경을 도안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감독과 제작자의 양가성: 상품과 예술 사이

작품 속 곽인우 감독은 “강약약강”이라는 태도로 움직인다. 또란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적 관습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창작을 시도하려는 히어로적 주체로 표상된다.


제작자 구중호 또한 악역이지만, 공동체 내부를 돌보는 모순된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양가성은 권력은 억압만이 아니라, 창작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조건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미셸 푸코의 통찰처럼, 권력은 단순히 억압적이지 않고 생산적(producing power)이라는 사실을 재현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양가성이 단순히 캐릭터적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존재 자체가 지닌 양면성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인간은 언제나 이기심과 연대가 뒤섞인 공간에서 자기 욕망과 타인 배려라는 상반된 힘의 동시성으로 살아간다. 바로 이 긴장과 모순이야말로 오히려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조건이다.


따라서 〈애마〉의 캐릭터들은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순적이고 불완전하며,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인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품은 “인간의 양면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인문학적 질문을 던진다. 욕망과 권력의 양가성은 부정되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필연적 조건임을 말해준다.



젠더 전도의 무대


〈애마〉의 스토리 핵심은 젠더 속성의 전도다.

사회가 규정한 젠더는 더 이상 본질이 아니다. 남성 캐릭터에게서 여성성을, 여성 캐릭터에게서 남성성을 발견하는 이 전도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젠더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과 맞닿아 있다.

주애는 남성 중심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인물로, 동성 여성과의 관계에서 우정과 긴장, 나아가 퀴어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현대적 상상력이 아니다.

역사 속 여성들의 은밀한 연대는 곳곳에 존재했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첩들은 경쟁자로 규정되었지만 때로는 아이를 함께 키우며 동지적 유대를 맺었다. 청대 후궁들은 황제의 총애 밖에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에도 시대의 유녀·게이샤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언니–동생’ 관계를 통해 폭력과 착취에 맞섰다. 서구 귀족 사회에서도 ‘로맨틱 프렌드십’이라는 여성 간 애정이 결혼 제도의 대안으로 공존했다.


〈애마〉 속 여성들의 연대는 이와 같은 역사적 계보 위에 놓인다. 억압 속에서 피어난 여성 간 친밀성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퀴어적 욕망의 은밀한 문화사로 이어져온 것이다.


주애나 희란 같은 여성 캐릭터가 저항을 통해 주체로 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남성 인물들이 보여주는 ‘수용성’의 태도다.

특히 곽인우 감독은 희란이 제안하는 에로·그로·넌센스의 세계를 끝내 받아들이고, 이를 작품의 철학으로 전환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창작적 합의가 아니라, 남성이 수용할 때 발생하는 미학적 전환을 드러낸다.


즉, 곽감독의 수용은 패배가 아니라 창조다. 그는 남성성의 권위를 고집하는 대신, 여성의 감각과 에로틱한 상상력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작품을 완성한다. 퀴어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성성 역시 고정된 힘의 논리가 아니라, 유연성과 개방성 속에서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애마〉의 젠더 전도는 그래서 단순히 여성의 주체화가 아니라, 남성의 수용성까지 포괄하는 상호적 전환의 미학이다.



(스포주의) 욕망과 파멸사이, 그 아슬한 줄타기

미나라는 캐릭터는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해방이 아닌 파멸이다. 그녀는 비밀접대를 거듭하다가 약물 중독으로 서서히 무너지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는 욕망의 드러남이 단순히 긍정적 해방으로만 귀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욕망을 드러내는 용기와 동시에 그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제도적 장치 속에 포획되는지를 상호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글쓴이로서 자전적인 고백을 덧붙이고 싶다. 나 또한 한때 돈이 많아지고 싶다는 욕망을, 전통적 여성에게 요구되는 ‘순결’과 ‘겸손’이라는 미덕과 달라서 부끄럽게 숨겨왔다. 하지만 끝내 드러내고 나니 어떤 한 자산가는 “복리에 투자하라”는 말을 남겼다. 20대 여성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조언에 그 누구도 몸을 팔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욕망을 노골적인 부끄러움으로 규정하기보다, 차라리 자본이라는 언어 속에서 길게 증식시키라는 제안이었다.


욕망은 이렇게 언제나 개인적 고백과 사회적 담론 사이를 오간다. 숨기는 순간엔 억압이 되고, 드러내는 순간엔 제도와 자본의 언어로 재배치된다. 미나의 죽음은 욕망의 파괴적 가능성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필연적이라는 점 또한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이 결정적 전환은 희란의 말을 타는 장면이다. 그것은욕망의 주체가 제도 밖으로 질주하는 순간이다. 여상위처럼 몸을 세우고 권력을 전도하며, 금지된 쾌락을 스스로 수행하는 자세에서 여성들은 더 이상 타자의 욕망을 연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욕망을 말 위에서 증명한다.


〈애마〉는 ‘에로·그로·넌센스’라는 장르적 기표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단순한 자극물로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1980년대 여성 배우들이 직면했던 억압을 재현하는 동시에, 이를 퀴어이론으로 변환하는 작품이었다.

즉 기묘한 장르적 외피 속에서, 〈애마〉는 OTT 시대의 젠더 정치학을 성찰하게 하는 하나의 메타 텍스트이자, 억압을 해체하고 욕망을 재서사화하는 문화적 사건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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