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미치광이 롹커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인 적 있는가?
우리는 매일 짧은 영상 하나, 밈 하나, 쇼츠 한 편을 공유한다.
친밀한 얼굴도 아닐뿐더러 목소리도 담기지 않은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퍼 나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짜 내 목소리를 낸 적이 있을까.
진짜 내 상처를 까 보인적이, 진짜 내 광기를 꺼내어 세상에 드러낸 적은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늘 ‘지나치다’고 배워왔으니까.
하지만 데이비드 보위는 달랐다.
그는 ‘미친 나’를 세상에 꺼내놓았다.
무대 위에서 그는 외계인이었고, 광인이었고, 괴물이었으며, 동시에 우리가 감히 말하지 못한 내면의 고백이었다.
우리가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그를 사랑한 이유는,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팬이 되고, 파헤치려는 욕망은 그 사람을 통해 내 안의 나를 볼 때 시작된다.
인연이란 결국 그런 연결의 언어다. 그러므로 다시 묻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해 본 적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을 드러낸 적 있는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미친 모습을 마주할 때 사랑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주에서 길을 잃은 자아, 데이비드 보위의 첫 번째 페르소나
1969년 여름, 아폴로 11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던 해,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고백을 세상에 띄웠다. 그것은 찬란한 승리의 노래가 아니었다. 오히려 승리 뒤에 남겨진 고요한 진공의 공간 안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한 존재의 이야기였다. 그 존재의 이름은 ‘톰 소령(Major Tom)’. 그는 발사 직전까지 지상 통제소와 교신하며 차분하게 우주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곧 그는 교신을 끊고 홀로 남는다. 차가운 별들과 공허한 무중력 속에서 그는 속삭이듯 말한다. “여긴 아주 이상한 곳이야. 그리고 뭔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위는 톰 소령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외로움, 그리고 세상과의 단절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보위는 이 곡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A Space Odyssey>를 보고 구상했다. 그는 단지 과학 기술의 환상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존재가 점점 분리되고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주’는 그에게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내면의 메타포였다.
〈Space Oddity〉는 구조 면에서도 당시로선 매우 전위적인 곡이었다. 단조로운 진행 대신, 불안정한 조성과 리듬의 어긋남이 이어지며 청자는 점점 중심을 잃는다. 곡의 초반은 어쿠스틱 기타와 멜로트론이 조심스럽게 발사를 준비하듯 천천히 시작된다. 그리고 곧 등장하는 “Ground Control to Major Tom”이라는 구절은 지상과 우주의 연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후 음악은 점점 균형을 잃고 떠다니기 시작한다. 보컬의 리버브나 좌우로 흔들리는 패닝 효과 등은 마치 라디오 교신이 점점 끊어지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리고 그 모든 사운드 디자인은 단 하나의 감정, 떠남으로 귀결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톰 소령이 떠나간 우주에서 느끼는 ‘특이한 감각’을 읊조리는 순간이다. “나는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떠다니고 있어.” 이 문장은 중력을 잃은 몸처럼, 그는 지상에서 맺어왔던 모든 연결을 하나씩 놓고 있다. 단절은 때론 아름답고, 때론 끔찍하다. 보위는 이 곡 전체를 통해 그 양면성을 음악으로 풀어낸다.
톰 소령은 단 한 곡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보위의 이후 음악 세계를 관통하는 고립된 자아의 상징이 되었다. 〈Ashes to Ashes〉에서는 “우린 톰 소령이 마약에 빠졌다고 들었지”라는 가사로 톰의 추락을 다시 언급했고, 말년에 발표한 <Blackstar>에서는 고통과 소외, 죽음을 마주하는 인물로 그가 암시되었다. 즉, 톰 소령은 우주로 날아간 비행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사회와 내면에서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모든 인간의 자화상이었다.
〈Space Oddity〉는 보위의 첫 히트곡이자, 예술가로서 자신의 첫 페르소나를 세상에 공개한 작업이었다. 그 페르소나는 영웅이 아니었고, 정복자도 아니었다. 그는 사라지는 사람이었고, 사라지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을 직면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정직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닿았다.
제2장. 지기 스타더스트, 별에서 온 소수자의 노래
1972년, 데이비드 보위는 더 이상 지구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라고 불렀고, 그것은 단지 별명이나 무대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전설적 존재였다. 지기는 지구 멸망 5년 전, 인류에게 음악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내려온 양성적 외계인이었고, 결국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감당하지 못한 채 자멸하는 록스타였다. 이 허구적 이야기는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라는 한 장의 앨범으로 완결되지만, 그 파급력은 이후 수십 년간 록의 지형을 뒤흔든다.
지기는 단지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지구에서 살아가기 힘들었던 모든 사람들, 그중에서도 퀴어, 젠더 논바이너리,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한 페르소나였다. 보위는 빨간 머리, 반짝이는 점프슈트, 글리터 메이크업을 하고 무대에 섰다. 당시 영국은 여전히 보수적이었고, 동성애는 법적으로는 합법화됐지만 사회적 시선은 냉혹했다. 그런데 한 남자가(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어떤 존재가) 무대 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봐. 나도 괜찮아. 그러니 너도 괜찮아.”
지기의 음악은 외형만큼이나 파격이었다. 글램록이라는 장르를 주도하며 록 음악에 시각적 언어와 젠더 해체적 감각을 도입했다. 그 이전까지 록은 남성적이고 공격적이며, 헤비하고 어두운 톤이 강했다. 그러나 지기의 노래는 감성적이고, 연극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이었다. “Moonage Daydream”의 격정적 사운드, “Starman”의 따뜻한 예언, “Rock ’n’ Roll Suicide”의 비극적 클로징까지, 이 앨범 전체가 하나의 서사였고, 곡마다 캐릭터가 살아 움직였다.
무대에서의 보위는 지기 그 자체였다. 그는 진짜 외계인이 된 것처럼 행동했고,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실제로 많은 팬들은 “보위는 지구인이 아니다”라고 확신했을 정도였다. 그는 무대 위 페르소나로 완전히 대체된 최초의 록스타였다. 그리고 그 페르소나는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였다. 그는 정체성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감각의 연극으로 제안했고, 그 제안은 수많은 억압받던 이들에게 “나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용기가 되었다.
지기의 마지막은 서글프다. 그는 결국 무너진다. 너무 많은 것을 품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담았다. 보위는 이 페르소나의 끝을 무대 위에서 직접 선언했다. “지기의 마지막 쇼입니다.” 그렇게 그는 페르소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을 지켜냈다. 보위는 두려웠다. 지기가 너무 커졌고, 자신이 그 안에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3장. 알라딘 세인 – 갈라진 자아, 그리고 광기의 미학
지기가 죽고, 데이비드 보위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인간은 지기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외계인을 연기하며 세상의 사랑을 받았고, 동시에 자신의 일부를 분명히 잃어버렸다.
그는 이미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페르소나가 필요했다.
지기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그러나 여전히 날카롭고 기이한 존재.
그 이름은 알라딘 세인(Aladdin Sane)
속삭이듯 말하면 “A Lad Insane”, 미친 소년이었다.
알라딘 내면의 균열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보위는 1973년, 미국 투어를 돌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양면성, 상업주의, 폭력, 광기, 성적 욕망 등을 목격한다.
지기 스타더스트가 별에서 온 예언자였다면, 알라딘 세인은 현실에 발을 디딘 광기 속의 화신이었다.
그는 지기의 죽음을 보고 태어난 인간이었고, 지기를 사랑한 대중을 향해 “나는 그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 위에는 번개가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단지 시각적 아이콘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면이 둘로 갈라지는 고통의 흔적이었다.
음악적으로도 알라딘 세인은 지기와는 달랐다.
앨범 <Aladdin Sane>은 하드록과 글램의 기반 위에 재즈, 블루스, 아방가르드한 피아노 솔로가 뒤섞인다.
특히 미치광이 같은 피아노 리프와 분열된 멜로디 구조로 자아의 혼란을 그대로 음악에 녹여낸다.
피아노를 연주한 마이크 가슨은 마치 즉흥적으로 무너지는 건축물 위를 걷듯 불협화음과 해체된 멜로디를 펼쳐낸다.
보위는 이 곡을 “세 번의 전쟁을 예감하는 청춘의 초상”이라 말했고,
그 청춘은 곧 그 자신이었다.
이 앨범의 또 다른 핵심은 미국에 대한 고백과 경멸이 뒤섞인 시선이다.
보위는 미국 투어를 다니며, 거리의 광기와 화려한 환상, 그리고 그 이면의 붕괴를 보았다.
그는 미국을 경외하면서도 두려워했고, 사랑하면서도 혐오했다.
이 모순된 감정은 “Cracked Actor” 같은 곡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늙은 할리우드 배우의 퇴폐적인 성관계를 조롱하고,
스타덤의 몰락을 음란하고 공허하게 노래한다.
이 시기의 보위는 명백히 무너지고 있었다.
<Aladdin Sane>을 작업하던 그는 여전히 지기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었고,
형 테리의 조현병 발병이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 불안은 음악 속에서 조각났고, 번개처럼 얼굴을 가로질렀다.
그는 ‘스타’가 되었지만, 그 스타의 정체는 분열 그 자체였다.
알라딘 세인은 지기보다 인간적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아팠다.
그는 외계인이 아닌, 이 세계의 광기 속에 사는 미친 소년이었고,
그래서 더욱 우리와 닮아 있었다.
보위는 더 이상 예언자가 아니었다.
그는 광장의 한복판에 선 채 스스로 갈라진 마음을 붙잡고,
그 틈에서 예술을 만들고 있었다.
제4장. 더 씬 화이트 듀크 – 얼어붙은 귀족, 감정 없는 사랑
데이비드 보위의 1976년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코카인에 절어 있었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기억은 끊어졌으며, 몸은 야위어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그는 또 하나의 페르소나를 세상에 풀어놓는다.
흑백 정장, 슬릭한 헤어, 무표정한 얼굴.
그는 자신을 “더 씬 화이트 듀크(The Thin White Duke)”,
즉 창백하고 마른 백작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귀족은 사랑을 노래했지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Station to Station> 앨범은 듀크의 전성기이자 동시에 보위의 심연이었다.
지기의 몽환, 알라딘 세인의 광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건조한 냉소와 강박적인 통제만이 남아 있었다.
앨범의 도입부는 무려 10분 가까이 이어지는 타이틀곡 “Station to Station”.
기차 소리와 융단 같은 드론 음향, 점진적인 템포 증가와 함께 보위의 목소리는 차갑게 선언한다.
“The return of the Thin White Duke, throwing darts in lovers’ eyes.”
사랑하는 자들의 눈에 다트를 던지며 돌아온 듀크.
그는 사랑을 부르짖지만,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만, 실체는 없다.
듀크는 중독, 허무, 예술적 무감각의 결정체였고, 보위의 가장 잔인한 자화상이었다.
이 앨범에서 보위는 기존의 글램이나 하드록에서 벗어나
소울과 펑크, 그리고 유럽 전자음악의 영향을 접목시킨다.
소울의 감정적 뉘앙스를 빼앗고, 그 자리에 공허를 집어넣는다.
“Golden Years”는 리듬감 넘치는 곡이지만, 가사는 그저 헛헛하다.
“Word on a Wing”에서는 구원을 갈망하는 듯하지만, 진심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의 목소리는 기도 같지만 동시에 조롱처럼 들린다.
모든 것이 연기되고 있고, 그 연기의 진실함조차 의심받는다.
듀크는 자기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의 보위는 공공연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파시즘적 발언을 했고, 히틀러를 “최초의 팝스타”라 말했다.
공항에서 나치 경례를 했다는 사진이 돌았고, 그는 정치적 오해와 논란의 정점에 섰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기의 나는 병들어 있었다. 나는 괴물이었고, 그 괴물에게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그의 음악, 이미지, 인터뷰 모두가 하나의 극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고, 동시에 살아 있었다.
그는 듀크였고, 동시에 듀크가 아니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페르소나에게 집어삼켜졌고,
그 안에서 간신히 숨을 쉬며, 자신을 음악에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Station to Station>은 걸작이었다.
차가운 미학, 진공의 감정, 미친 듯이 정교한 사운드 구성까지
비평가들은 이 앨범을 보위의 가장 완성도 높은 앨범 중 하나로 평가했다.
보위는 망가지고 있었지만, 그 망가짐을 형식의 끝까지 밀어붙여 아름다움으로 전환시켰다.
그것이 그가 가진 재능이자 저주였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베를린으로 향한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듀크를 남기고 떠났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너진 도시 베를린으로 자신을 유배시켰다.
그러니 듀크는 죽지 않았다.
그는 보위가 두고 간 괴물로 예술 속에 영원히 얼어붙은 채, 지금도 듣는 이의 귀를 얼게 만든다.
제5장. 베를린에서의 실험과 재탄생, 그리고 단 하루의 영웅
1976년, 데이비드 보위는 모든 걸 두고 미국을 떠났다.
명예, 마약중독, 듀크, 환란의 미국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기 위해
베를린이라는 낡고 상처 입은 도시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베를린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동과 서, 냉전의 경계와 언어, 그리고 고립된 사람들.
그 공간은 마치 그의 내면 같았다.
갈라지고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그 도시의 모습에서 내 안의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았다.
지기도, 세인도, 듀크도 아닌, 데이비드 보위 자신으로 돌아왔다.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손잡고 시작한 베를린 시절의 첫 앨범은 <Low>였다.
그 음악은 모든 것을 해체하고 있었다.
기존의 록 공식은 무너졌고, 구조는 파편화되었으며,
가사는 간헐적으로만 등장했고, 앰비언트 사운드가 주요 언어가 되었다.
마치 자신을 다시 조립하기 위한 첫 설계도 같았다.
이 앨범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심지어 실망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낯섦이야말로, 보위가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다음.
<Heroes>가 도착했다.
보위는 어느 날, 베를린 장벽 옆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을 보았다.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키스하고 있었다.
그 순간, 보위는 깨달았다.
진짜 영웅은 신이 아니라, 단 하루를 감히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어. 단 하루만이라도.”
그 메시지는 단순했지만, 너무도 강력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에 관한 노래였고, 인간에 관한 노래였다.
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다는 비극을 딛고,
우리는 그 벽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7년, 그는 베를린 장벽 앞 무대에 섰다.
장벽 반대편, 동독 시민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Heroes〉를 따라 불렀고,
그날 밤, 수백 명이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2년 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그는 그날을 “목이 메고, 가슴이 찢어지는 밤이었다”라고 기억했다.
독일 정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날,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음악은 장벽을 무너뜨렸다.”
보위의 예술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소수자들을 세상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괴물을 만들었지만, 그 괴물은 나였고, 당신이었고, 우리 모두였다.
그는 무대 위에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다. 나처럼 너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드러낸 적 있는가?
당신의 가장 날 것의 고통과 가장 미친 순간을, 세상에 보여준 적 있는가?
보위는 그걸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미치도록 드러냈다.
그래서 세상이 흔들렸다.
지금 당신의 안에도 ‘지기’가 있고, ‘톰 소령’이 있고, ‘듀크’가 있다.
그들을 꺼내어, 사랑하라.
당신이 진짜로 미쳐야 할 때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순간, 당신은 기꺼이 하루의 영웅이 될 수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