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퀴어] 남성의 관능을 극대화 한 실루엣, 톰포드

핏과 태도로 완성되는 하이엔드 매력

by SPIT


뉴욕의 밤은 언제나 나를 압도했다. 돈 한 푼 없는 배낭여행자였지만, 발걸음은 미트패킹 디스트릭트로 향했다. 그 거리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파티씬을 구경하는 게 작은 취미였는데, 드레스와 수트를 입고 한껏 드레스업을 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청춘은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절묘하게 허리를 감싸는 실루엣과 걸음마다 번지는 관능속에서 느꼈다, 진짜 섹시함은 노출이 아니라 형태와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몇 해 뒤, 우연히 톰 포드를 피팅할 기회가 있었다.

그 순간, 컴플렉스 덩어리였던 내 실루엣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낯선 자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완벽한 핏을 설계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퀴어 디자이너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순간부터 톰 포드는 나에게 단순한 브랜드를 넘어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톰포드의 패션 : 실루엣, 컬러, 소재


톰 포드는 관능을 구조화하는 디자이너이다.

1990년대 침체된 구찌를 화려함과 힘의 상징으로 되살린 순간부터 그의 이름은 패션계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고급스러운 소재와 대담한 라인은 절묘하게 맞물려 하나의 Scene(장면)을 만든다.

섹슈얼리티 역시 그에게는 단순한 노출이 아니라 자신감이라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의 남성복 컬렉션에서 대표적인 것은 오코너(O’Connor), 쉘튼(Shelton), 윈저(Windsor) 수트다.


오코너 라인은 날렵하고 현대적인 실루엣이 특징이다.

좁은 노치 라펠(V자 형태로 파인 전통적 깃 디자인)과 짧은 재킷 길이, 그리고 허리를 강하게 잡아주는 구조적인 테일러링으로 착용자의 체형을 한층 슬림하게 보이게 한다. 어깨선은 자연스럽지만 단단하게 잡혀 활동성과 기품을 동시에 살린다.

이 라인은 영화 007 스카이폴과 스펙터에서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가 입은 수트로도 유명하다.

스파이 액션 장면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날렵함 덕분에, 포멀함과 기능성을 모두 원하는 현대적 남성에게 사랑받는다.


쉘튼은 조금 다르다. 라펠은 여전히 노치이지만 폭이 오코너보다 넓어 안정감이 있다.

부드러운 어깨 라인이 주는 여유로움 덕분에 낮에는 회의실에서, 밤에는 칵테일 파티에서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유지한다. 날카로운 긴장감 대신 품위 있는 여유가 스며든 라인이다.


그리고 윈저 브리티시 테일러링에서 영감을 받은 어깨핏과 넓은 피크 라펠(라펠 끝이 위쪽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디자인)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라펠 끝이 위로 뾰족하게 솟아올라 시각적으로 어깨선을 넓어 보이게 하고, 권위 있고 포멀한 분위기를 준다.

중요한 회담이나 레드카펫 같은 곳에서 윈저는 한 발 앞에 나서는 힘을 부여한다.


세 라인은 서로 다른 목적과 장면을 위해 설계되었지만 그 뿌리는 같다.

입는 순간 자신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톰 포드의 수트는 옷을 넘어 남성의 자신감과 섹시한 실루엣을 증명하는 구조물에 가깝다.


반면, 톰 포드의 스웨이드 트러커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통적으로 워크웨어의 상징이었던 트러커 재킷을 최고급 스웨이드와 완벽한 재단으로 재탄생시켰다. 블랙, 다크 브라운, 딥 네이비 같은 절제된 색감을 사용했고 여기에 군더더기 없는 절삭과 촉감 좋은 가죽은 데님 위에 걸쳐도, 드레스 팬츠 위에 얹어도 품격을 잃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한 힘을 발휘하는 아이템이다.


그의 여성복 세계는 더욱 극적으로 변한다.

이브닝 드레스는 실크 새틴의 매끄러움, 벨벳의 깊이 있는 광택, 그리고 메탈릭 래미네이트의 빛으로 몸을 감싸며, 허리를 부드럽게 조이고 힙과 어깨 라인을 강조하는 핏으로 관능을 표현한다.

맥시 드레스는 실크 크레이프와 시폰 소재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거나 드러내며, 바디 라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듯 떨어진다. 색채는 모노톤에서 주얼톤까지 다양하게 변주된다.

칵테일 드레스는 무릎 위 길이에 스팽글과 비즈, 페이예트를 더해 슬림하게 몸을 감싸며 짧은 순간에도 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남성복에서는 정교한 테일러링과 클래식 아이템의 격상을, 여성복에서는 빛과 곡선을 활용한 극적인 연출을 통해 그는 절제와 대담함을 동시에 구현한다.

결국 톰 포드가 만드는 모든 옷은 한 사람의 존재감을 한 프레임 속에서 완성하는 장치다.


그의 세계관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향수다.

프라이빗 블렌드 컬렉션은 각진 직육면체 바틀 안에 ‘오드 우드’, ‘토바코 바닐’, ‘로스트 체리’ 같은 향을 담았다. 이 향은 강렬하고 오래 지속되며, 성별의 경계를 넘어선다.

시그니처 라인의 ‘블랙 오키드’는 화려함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향으로, 여성성의 힘을 험악하게 표현한 대표작이다.

톰 포드는 향수를 계절의 온도와 공간의 무드에 맞춰 제안하며, 특히 파란 바틀은 청량한 여름의 계절감을 연출한다.


굵은 프레임과 시그니처 T자 메탈 장식이 특징인 아이웨어는 그의 미학을 얼굴 위에 얹는 방식이다.

그는 안경을 단순한 시력 보조가 아닌 시선의 프레임으로 보며, 빛 아래에서도 그림자 속에서도 동일한 힘을 발휘하게 만든다.


톰 포드의 패션은 언제나 ‘구조와 관능’의 균형 위에 서 있다. 그는 몸을 어떻게 감싸고,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안다.

남성복에서는 라펠의 각도와 어깨 구조, 허리핏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착용자의 체형과 기운을 극대화한다.

여성복에서는 감각을 자극하는 소재를 사용해 바디라인을 조각하듯 설계한다.

또한 그의 패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건 ‘움직임까지 디자인된’ 실루엣이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세련된 방식을 제시하는 데 있다

입는 사람의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옷,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스타일.

톰 포드에게 패션은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다.


톰 포드와 리처드 버클리: 사랑과 미학을 함께 지은 시간

그의 삶에서 이 철학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다.

1986년, 패션쇼 백스테이지에서 처음 마주친 리처드 버클리였다.

당시 리처드 버클리는 33세의 패션 에디터였고, 톰 포드는 25세의 젊은 디자이너 지망생이었다.

첫 대화에서 그 둘은 이미 서로의 세계를 알아본 듯 둘은 곧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다.

에이즈가 도시를 휩쓸던 시절, 수많은 친구들을 잃으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버텼다.

오랜 세월 동안 파리와 뉴욕,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서로의 일과 예술을 지지했고,

2012년에는 대리모를 통해 아들 알렉산더를 맞았다.

2014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해에 런던에서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고,

2021년 9월 19일 버클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동안 서로의 가장 든든한 관객이자 비평가로 살았다.


톰 포드의 런웨이와 향수, 수트와 드레스 속에는 언제나 리처드 버클리의 그림자가 있다.

절제된 우아함과 깊은 감정이 공존하는 이유는 그의 디자인이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삶을 증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톰 포드에게 패션은 단순히 옷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믿는 세계를 구체적인 형태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좋은 옷은 당신을 변화시킵니다. 단순히 잘 보이게 하는 것을 넘어, 당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는지를 바꿉니다.”


결국 그의 철학은 간결하다. 옷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는 가장 세련된 언어이며 패션은 그 언어를 통해 세상과 나누는 대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위대한퀴어] EIFF에서 만난 퀴어 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