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퀴어] EIFF에서 만난 퀴어 시네마

에든버러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얼굴들

by SPIT

나는 한때, 사랑과 섹스는 동일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더 극단적으로 사랑은 섹스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도 해봤다.

하지만 그 사람의 몸을 알고 싶어서 시작한 관계가

어느새 그 사람의 말투, 습관, 과거까지 닮아갔던 적이 있다. 그 욕망은 단순히 섹슈얼한 형태를 벗어나,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 존재적 전이로 이어졌다.


프랑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문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피에르 드 마리보의 <마리안느의 일생>을 읽는다.

“가슴 한쪽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게 사랑이었다, 논리로 환원되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일부가 되어가는 고통스러운 일체감과,

관계가 해체되고 다시 나를 찾아야 하는 슬프도록 고귀한 경험.

즉, 내게 사랑은 자아를 발견하고 해체하고 전이하는 영적인 경험이다.


나의 20대를 감싸 안아준 책, 영화, 잡지들과 그 안의 사람들이 전한 건 사랑과 끌림은 언제나 ‘이성애적 서사’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뿌리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영화와 그 영화들의 발판인 영화제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2024년 새롭게 재출범한 에든버러 국제영화제(EIFF)에서 초연될 퀴어 중심의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Blue Film〉 사랑은 기억을 건드릴 때 시작된다

Kieron Moore in Blue Film (Image: EIFF)

Director: Elliot Tuttle. Narrative Feature. Cast: Kieron Moore, Reed Birney. United States. 2025. 1hr 28min. English.


쉬게 돈을 버는 것과 익명의 섹스라는 유혹에 이끌려 퀴어 캠보이가 된, 아론 이글은 자신을 고용한 수수께끼의 남자와 놀랍도록 개인적인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다.

하룻밤 동안 두 남자는 말과 감정의 전쟁을 벌이며

오염되고 공유된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탁월한 연기, 정교한 각본, 우아한 시각미가 더해진 이 독특한 영화는 경계 위의 직업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노골적으로 건드려 깊이 있는 충격을 선사한다.


2. 〈In Transit〉 두 여자의 시선, 두 개의 그림자

In Transit (Image: EIFF)

Director: Jaclyn Bethany. Narrative Feature. Cast: Alex Sarrigeorgiou, Francois Arnaud, Jennifer Ehle. United States. 2025. 1hr 22min. English.


수수께끼 같은 화가는 한 젊은 바텐더를 자신의 모델로 초대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관계가 형성된다.

그 관계는 결국 두 여성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Jennifer Ehle가 연기한 화가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사랑하고, 탐색하고, 작품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 인물이다.

모델로 초대된 젊은 바텐더는 처음엔 수동적이지만,

점차 그녀를 거울삼아 자신의 욕망과 상처를 응시하게 된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회화적인 미장센보다 그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의 지형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쉽게 단일화해 버린 사랑의 형태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3. 〈Low Rider〉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도로

Low Rider (Image: EIFF)

Director: Campbell X. Narrative Feature. Cast: Emma McDonald, Thishiwe Ziqubu, Martin Kluge. United Kingdom, South Africa. 2025. 1hr 33min. English.


한 영국인 여성이 남아프리카로 떠나 관계가 끊긴 아버지를 찾기 위한 로드 트립을 시작한다.

여정 중 그녀는 매력적인 낯선 이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와 함께 여행을 이어간다.

자신에게서 멀어진 아버지의 존재는 그녀의 불안정한 자아감의 근원이었고, 그 공허함 속에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찾는 여정이란, 사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일이다. 〈Low Rider〉의 주인공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떠난다.

하지만 도착한 곳에서 그녀가 마주한 건 또 다른 경계 밖의 이방인이다.

사랑은 누군가와 정착하는 게 아니라, 함께 떠도는 법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4. 〈On The Sea〉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에로스

Director: Helen Walsh. Narrative Feature. Cast: Barry Ward, Lorne Macfadyen, Celyn Jones, Liz White. United Kingdom. 2025. 1hr 51min. English.


웨일스 해안을 배경으로 한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헬렌 월시의 에로틱한 사랑 이야기 속에서, 결혼한 홍합 양식업자의 단조롭고 평온한 일상은 수수께끼 같은 낯선 이의 등장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우아한 시각미, 강렬한 연기, 그리고 놀라울 만큼 솔직한 대사를 갖춘 이 작품은, 가장 솔직하고 관능적이며 날것의 감성을 담은 퀴어 시네마라 할 수 있다.

사랑은 늘 파문이고, 파문은 곧 바다다.

이 영화는 그것을 알고 있다.


5. 〈I Would Never F*ck You〉 익살스러운 지옥

On the Sea (Image: EIFF)

Director: Alanna Murray, Mika Lungulov-Klotz. Narrative Short.

Cast: Neil Fleischer, Jeffrey Grover, Ralph Feliciello. United States. 2025.


이 단편은 유쾌하다. 그리고 약간은 끔찍하다. 왜냐하면, 너무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짝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작은 피규어를 가지고 상황극을 하는 ‘이라’의 이야기는 우리의 어설픈 감정 표현을 조롱하듯 보여준다. 하지만 그 안엔 사랑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있다.


이 영화는 사랑이 꼭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때론 웃기고 치사한 방식으로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영화제는 단순한 상영의 자리가 아니라 감춰진 언어의 무대다.


에든버러 국제영화제(EIFF)는 7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완전히 새롭게 재출범했다.

새로운 경쟁 부문, 관객 투표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성과 정체성, 다양성의 교차점에서 출발한 영화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퀴어 초연작들 〈Blue Film〉, 〈In Transit〉, 〈Low Rider〉, 〈On The Sea〉, 〈I Would Never F*ck You〉은 단지 ‘퀴어’라는 정체성에 갇힌 영화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어로 명명하지 못했던 사랑의 형태와 자기 안의 이질적인 감정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우리는 지금, 감정을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넷플릭스, MUBI, HBO Max 같은 글로벌 OTT 플랫폼들은 매년 더 많은 퀴어 콘텐츠를 수입하고 그 수용성은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검열과 마케팅, 배급의 경계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언어로 관객이 진심으로 반응할 수 있는 공간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 영화들이 끝내 우리에게 말하는 건 간단하다.

사랑은 항상 ‘형태 없는 끌림’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 끌림을 통해 나 자신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갱신하는 것.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보고, 영화제를 기다리고,

낯선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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