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못 마셔본 원소주 이야기
비크닉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마케팅으로 밥벌이를 한지 1n년차 불혹의 직장인 한재동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고백이지만 취미는 쇼핑이고, 저의 첫 직장은 백화점이었습니다. 말그대로 ‘덕업일치’였지요. 좋아서 하던 것이 일이 되면 안된다는데 쇼핑은 예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모든 브랜드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가지고 싶은게 많지만 한정된 자원의 슬픔을 아시나요?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일지도;;;) 앞으로 저의 물욕을 자극하는 브랜드들의 튜토리얼을 제공해 드리려합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소주 사려고 줄 서는 시대가 왔다
#INTRO: 삼겹살 불판 옆에 초록색 소주병? 우리 소주가 달라졌어요.
‘소주’와 ‘힙하다’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간 소주의 이미지는 ‘독하다’ ‘녹색병’ ‘삼겹살과 어울리는 술’ 정도였지요. 제가 술을 처음 접했던 세기말 즈음 소주는 독주라는 인식에 점점 젊은 세대에게 외면받기 시작했습니다. 주류회사들이 선택한 돌파구는 허름한 삼겹살집 한구석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여자 연예인을 모델로 쓴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올 줄은 솔직히 몰랐습니다.
변화가 체감 된 것은 2019년 진로이즈백이 출시되면서예요. 우선 병이 달라졌습니다. MZ세대의 뉴트로 트렌드를 자극하는 디자인이었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대형소주잔 같은 굿즈는 품절 대란을 일으켰고, 패션잡화 등 다양한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이 이어졌습니다. 소주병의 재활용을 위한 소주 업계의 녹색병의 사용 협약을 깼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성공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말 소주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소주매니아라는 가수 박재범이 만든 전통 소주 ‘원소주’를 사기 위해 백화점 오픈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팝업스토어가 끝나고 온라인으로 판매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1분 만에 품절이 되는 ‘1분 컷’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의 원소주 구매인증을 보면 그간 소주와는 친하지 않을 것 같은 MZ세대 인싸분들이 대다수입니다. 원소주는 어떻게 MZ세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브랜드가 되었을까요?
미리 고백하건대 술맛에 대한 리뷰는 없습니다. 아직도 1분 컷의 벽을 넘지 못해 세계 최초로 제품을 마셔보지 못하고 글을 썼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주류의 중고 거래는 불법입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술 마신 것 같지만 사실 술맛 잘 모릅니다. 족히 주류회사의 기둥 하나 정도는 제 돈으로 올려준 거 같지만요.
원소주의 오픈런, 드디어 증류식 소주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소주는 희석식 소주와 증류식 소주가 있어요. ‘서민물가 비상, 소주 n천원 시대’ 이런 식의 기사에 등장하는 녹색병이 바로 희석식 소주입니다. 우리의 소울푸드 삼겹살의 단짝이며, 편의점에서도 이천 원 이하(360ml기준)에 구할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 주류입니다. 원소주는 전통 방식으로 제조한 증류식 소주에요. 증류식 소주에서 가장 대중적인 화요나 일품진로의 경우 350ml 용량에 편의점에서 만원 중반대, 원소주는 같은 용량에 14,900원으로 프리미엄 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떠오르는 소비주체인 MZ세대의 술 소비 트렌드가 기성세대와 달라졌다는 거예요. 예전 ‘술 마시고 놀자’ 라는 것이 ‘부어라 마셔라 or 마시고 죽자’ 의 뜻이 강했다면, 지금은 술의 맛과 스토리를 즐기자는 뜻이 중요해졌습니다. 일단 원소주로 부어라 마셔라 하려면 술값 자체가 최대 7배가 더 비싸요.(물론 돈으로 플렉스 할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는 술에 취해서 서로 망가지는 것을 즐겼다면, 지금은 원소주라는 브랜드를 경험해 보았다는 것을 공유하는 놀이가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간 소주 시장의 아주 일부분이었던 '증류식 소주의 시대가 열렸다!'라는 반응도 일리가 있습니다.
증류식 소주의 인기는 원소주의 폭발적인 인기 이전에도 조짐이 보였습니다. 힙스터들이 뉴욕에서 구해서 먹었다고 입소문이 돌았던 ‘토끼 소주’나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과 배우 고소영 등이 극찬했다는 ‘KHEE 소주’ 등도 스토리와 희소성 등으로 SNS 등에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 전통 소주의 매력에 빠진 미국인 브랜 힐이 술 빚는 법을 배워 2016년 뉴욕에서 생산한 증류식 소주. 누룩을 수입하지 못해 뉴욕에서 직접 배양에 성공하면서 이슈가 됨.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전통 소주로 뉴욕에 방문한 사람들의 여행 기념품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23도의 화이트 라벨과 40도의 블랙라벨이 있으며, 2020년에 충청북도 충주시에 양조장을 세워 지역 전통술로 인정받아 온라인 판매할 수 있었다.
당근마켓에서 공병까지 팔고 있는데, 이건 스타의 굿즈일까?
‘Soju(소주)’는 박재범의 첫 번째 미국 진출 싱글 곡의 제목입니다. 가사 내용 부터가 소주를 진탕 마셔보자는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 있을 정도로 소주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 있죠. 2019년부터 박재범은 소주 회사를 차릴 것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이만한 브랜드 스토리텔링이 있을까요?
소주병의 디자인 패키지에도 하나하나 브랜드 스토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일단 ‘원’이라는 네이밍에는 하나(One)와 승리(Won)와 소망(want)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합니다.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태극기의 건곤감리에서 패키지의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네요. 정말 하나하나 인스타에 자랑하기 좋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박재범의 팬이 아니라고 할지라도요!
하물며 박재범의 팬이라면 어떨까요? 박재범 팬덤은 화력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예전에 박재범이 방송에 신고 나왔던 곰돌이 양말을 사기 위해 공장에 연락해서 단종된 모델을 재생산까지 했던 일화는 팬덤 굿즈업계에서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화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의 원소주 인기를 단순 스타 팬덤으로 치부하는 시선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당장 당근마켓에 들어가서 원소주를 검색해보세요. 심심치 않게 공병을 거래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알고보니 주류사업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잘 나가는 부업!
잘나가는 스타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주류사업을 하는 것은 할리우드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에요. 드웨인 존슨의 테레마나 데킬라, JAY-Z의 아르망 드 브리냑 샴페인, 조지 클루니의 카사미고스 데킬라, 라이언 레이놀즈의 에비에이션 진, 매튜 맥커너히의 롱브랜치 버번 등이 유명합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자신이 좋아하는 술의 개발부터 브랜딩 전략에 참여하고 홍보모델까지 됩니다. 조지 클루니가 데킬라의 매력에 빠져서 만든 ‘카사미고스’를 세계 최대 주류업체인 디아지오에 10억 달러에 매각해서 대박을 터트린 이후,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주류사업을 시작했어요.
정부는 2017년 전통주의 보호·육성 차원에서 국가에서 지정한 일부 전통주에 대해 온라인 판매를 허용했다. 전통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래 3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면 된다.
① 주류 부문의 국가 또는 시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조하는 주류 / ② 주류 부문의 대한민국식품명인이 제조하는 주류 / ③ 농업 경영체 및 생산자 단체가 직접 생산하거나 주류 제조장 소재지 관할 또는 인접 시·군·구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주 원료로 제조하는 주류
원소주는 양조장이 강원도 원주에 위치해 있고 100% 원주에서 생산된 쌀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통주로 분류되어 온라인 판매가 가능하게 되었다.
셀럽마케팅으로 ‘원소주’ 이슈화까지는 성공, 지속적인 브랜딩은 가능할까?
2월 런칭 이후 백화점 오픈런과 가로수길 팝업스토어 완판, 온라인 자사몰까지 연이어 이어지는 매진사례 등 현재까지 원소주는 분명 ‘힙’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 모습에서 두 가지 예전 기억이 겹칩니다. 하나는 좀 오래된 '허니버터칩'이고 하나는 얼마 전 GD와 나이키의 ‘퀀도(Kwondo)1’입니다.
허니버터칩 열풍은 무려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심지어 당시에는 허니버터칩과 다른 인기 없는 과자를 묶어 파는 ‘인질 마케팅’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허니버터칩의 인기 요인은 SNS를 통해 퍼진 입소문과 제조사인 해태제과의 공급량 조절로 인한 희소성 때문이었는데, 공급량이 늘어나자마자 인기는 눈 녹듯이 식어버렸습니다.
‘퀀도(Kwondo)1’는 나이키와 GD가 설립한 패션브랜드의 콜라보레이션 운동화인데, GD가 지인 111명에게 한정판 신발을 선물한 것이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엄청난 바이럴을 일으켰어요. 본 판매에서도 인기가 이어져서, 발매되자마자 완판되었으며 현재 리셀 플랫폼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스타와 희소성이라는 키워드가 원소주와 닮지 않았나요?
원소주는 전통 방식의 주조법으로 현재 물량을 확대 공급하는 것이 당분간 어려워 보입니다. 물론 물량을 더 공급하는 것이 매출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사실 허니버터칩의 예시에서 보았을 때 브랜딩의 측면에서는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거든요. 만약 원소주를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지금 같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원소주의 고민은 바로 이 부분이 될 거예요. 시간이 지나 이슈에서 밀려가고, 유통채널도 공급도 늘려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브랜드 전략을 취할 것인지! 그 결과에 따라 원소주가 ‘원히트원더’가 될지 ‘스테디셀러’가 될지 결정될 겁니다. 그때면 저도 한 병 맛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