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핸드크림 다 써봤지? 韓 연매출 914억의 이솝
비크닉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쇼핑하러 가면 아내보다 더 신나게 돌아다니는 마케터 한재동입니다. 브랜드 매장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수많은 매장 중에서도 유독 눈을 사로 잡는 곳이 있습니다. 열과 오를 맞춰 가지런히 진열된 갈색 병들이 가득한 브랜드 매장이에요. ‘갈색병’이란 말 한마디에 벌써 눈치 채셨을 겁니다. 오늘은 품질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깐깐함과 미니멀하고 정갈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유명한, 호주의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Aesop)’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고객 경험'은 요즘 마케팅에서 자주 접하는 용어예요. 간략하게 정의하면, 고객이 제품을 선택해 구매하고, 사용하면서 겪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리포트나 제안서에서 많이 보고 쓰는 말인데, 실제로 크게 와닿은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지인 선물을 사기 위해 이솝 매장에 들렀다가 '아, 이게 바로 고객 경험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제품을 사는 과정이 '쇼핑'이 아니라 마치 해외 '고급 리조트의 컨시어지 서비스'를 받는 것 같았거든요.
우선 매장 외관부터 제품을 팔기 위한 다른 여느 매장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이솝의 매장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인테리어가 가장 큰 특징으로, 수납의 미학을 보여주려는 듯 설계된 선반 위엔 가지런히 놓인 갈색병이 가득합니다. 이 모습이 어찌나 인상적인지, 다른 특별한 인테리어 오브제가 필요하지 않아요. 또 매장 안에는 아로마 향이 가득해요. 입구를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콧속부터 머릿속까지 환기됩니다.
직원은 '컨설턴트'라고 불러요. 물건을 팔기 보다, 매장을 찾은 사람에게 알맞는 제품을 찾아준다는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컨설턴트는 방문객에게 1:1로 붙어서 접객을 합니다. 이들의 서비스는 다른 브랜드와 결이 달라요. '고객은 너무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하고, 무관심하면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백화점의 고객서비스 매뉴얼이에요. 그래서 고객과의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게 중요하죠.
그런데 이솝은 매우 적극적으로 고객에게 다가갑니다. 고객과의 시간을 위해 과감히 대기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제품을 추천해요. 필요하다면 매장의 싱크대에서 손을 닦으며 제품을 테스트해 보기도 합니다. 이걸 이솝에서는 싱크데모(Sink Demo)라고 하는데요, 이를 위해 모든 이솝 매장엔 싱크대가 설치돼 있어요. 싱크대가 중요한 인테리어 요소가 되기도 하고요.
지금은 글로벌 스킨케어 브랜드이지만 이솝의 첫 시작은 호주의 작은 미용실이었습니다.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Dennis Paphitis)는 '아마데일 헤어살롱'이라는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손님을 가려 받을 정도로 동네에서 까다로운 헤어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그는 당시 사용하던 헤어 제품이 성에 차지 않았어요. 화학약품 일색이었던 염색약이나 스타일링 제품은 냄새가 고약하고 피부에도 좋지 않았거든요.
늘 불만이 가득한 그에게 어느날 귀인이 등장합니다. 다름 아닌 그의 미용실 직원이었던 수잔 산토스(현재 이솝의 글로벌 최고 고객 책임자)예요. 수잔은 "제품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고, 데니스는 실제로 그 말을 들었어요. 염색약에 천연 에센셜 오일을 섞어서 효과와 향을 만족시키는 제품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이렇게 시작한 게 바로 1987년 탄생한 이솝이에요. 깐깐한 데니스는 식물성 원료를 기본으로 한 헤어 제품개발에 몰두했고, 이후 스킨·바디·핸드·향수 등으로 제품군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1990년 이솝의 베스트셀러인 핸드크림 '레저렉션 아로마틱 핸드밤'과 2001년 화장수 '파슬리 씨드 안티 옥시던트 페이셜 토너' 등 히트작과 함께 꾸준히 성장했지만, 이솝은 여전히 호주의 작은 브랜드에 불과했어요. 이솝에게 세계 무대를 날 수 있는 날개가 달린 것은 가치관이 통하는 파트너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어요. 파트너는 바로 브라질의 국민 뷰티 기업 '나투라앤코(Natura&co)'.
나루라앤코는 환경보호와 기업의 윤리적 역할에 진심인 세계 4위 글로벌 뷰티 그룹사입니다. 2012년 이솝은 나투라앤코에 인수합병됐는데요. 뷰티업계의 화려한 마케팅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제품에 집중하며 친환경·순환경제·윤리적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솝에게는 정말 잘 맞는 파트너였죠. 덕분에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브랜드 정체성이 잘 유지됐어요. 대기업에 흡수된 많은 브랜드가 자신을 잃고 위기를 맞는 것과는 달랐죠.
변화와 혁신. 많은 브랜드가 좋아하는 말이지만, 이솝에겐 가장 경계하는 표현입니다. 이솝은 출시된 제품을 리뉴얼 하거나 혁신적인 마케팅을 하지 않아요. 사실 이건 자신감의 표현이에요. 처음부터 '완벽했다'는 거죠. 보통 이솝은 제품 하나를 개발하는데 3~4년, 길게는 10년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렇게 제품을 출시하면, 보통의 마케터는 긴 개발 기간과 완벽한 효능을 강조해 알리고 싶어 합니다. 유명한 모델을 기용해 깨끗한 피부를 클로즈업해 보여주고, 사용한 좋은 원료를 보여주며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총동원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솝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신들이 사용한 유기농 원료에도 ‘자연주의’ ‘유기농’이란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고객의 혼란을 줄 수 있단 이유에서죠. 오히려 홈페이지에 ‘식물 기반 원료를 과학 기술에 기초해 만들었다’고만 말해요.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오히려 더 신뢰를 얻었어요. 이들의 담백함과 과장하지 않는 태도에 말이죠.
마케팅의 방향도 브랜드 자체를 고급스럽게 꾸미거나, 제품을 강조하는 다른 뷰티 브랜드들과 결이 달라요. 목표 자체가 균형 잡힌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이솝의 철학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케팅 콘텐트가 피부 건강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인 영역까지 다양해요. 이솝의 매장이나 패키지, 뉴스레터에 인사이트를 주는 명사들의 격언이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이솝의 마케팅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는 호주의 주간지 ‘새터데이 페이퍼(Saturday Paper)’와 2016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에세이 공모전입니다. The Lucky Country를 쓴 호주 작가 도널드 혼(Donald Horne)의 이름을 딴 ‘혼 프라이즈(The Horne Prize)’가 매년 진행되는데요. 주제는 호주인의 삶 전반에 대한 것으로, 수상작은 호주 이솝 매장에 비치된다고 합니다.
지난해엔 음악과 연계된 재미있는 시도도 했어요. 향수 ‘아더토피아’ 출시를 기념해 인터넷 라디오 플랫폼 월드와이드 에프엠에 ‘ 이솝 라디오마티크 믹스테이프(Radiomatique Mixtapes)’를 런칭했어요. 향기와 소리의 만남을 주제로 전 세계 아티스트들이 60분가량의 플레이리스트를 업로드합니다. 아티스트들의 인종, 장르, 지역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어요.
심플함과 일관성으로 유명한 브랜드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많은 분이 애플이라고 하겠지만, 이솝 또한 복수정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솝의 제품은 심플한 패키지에 담겨 있어요. 갈색병에 붙어있는 베이지색 라벨에는 장식이라고는 검은 띠 한줄이 전부이고, 헬베티카 폰트로 간결하게 제품 설명이 적혀있습니다. 가장 최소한의 디자인을 한 것 같지만, 그 단촐함이 곧 이솝의 브랜딩이 되었어요. 이제는 많은 신생 브랜드가 이를 따라 하려고 하죠.
또한 친환경이라는 메시지가 일관적으로 적용됩니다. 이솝이 갈색병을 쓰는 이유는 빛과 자외선 투과를 막아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로 인해 방부제를 최소한으로 사용할 수 있어 친환경적이죠. 병과 종이 박스 또한 재활용한 재료로 만들고, 일회용 쇼핑백 대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패브릭 주머니에 담아 줍니다. 인쇄물도 모두 식물성 콩기름 잉크만을 사용하고요. 심지어 매장 인테리어도 폐점하는 다른 매장의 가구를 재활용합니다.
이솝의 브랜딩에서 가장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품 디스플레이 방식입니다. 보통 매장 디스플레이는 제품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적은 수의 제품을 전시하고 많은 여백 공간을 확보해요. 이솝은 정반대입니다. 선반에 많은 수의 제품을 홀수 단위로 정갈하게 배열해 둡니다. 이솝 매장 직원(컨설턴트)들의 중요한 일의 하나가 제품의 열과 오를 맞추는 것이라고 해요. 통일성 있는 갈색 병들이 모던한 인테리어의 매장에 정갈하게 전시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풍성함과 우아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솝은 전 세계 각지에 시그니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들과 협업해서 같은 형태가 아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매장에서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문화를 반영해서 고객과의 유대감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해요. 우리나라에도 현재 14개의 시그니처 매장이 있습니다.
이솝의 아시아 제너럴 매니저 프레데리크 세일러가 매거진B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매출이 큰 시장’이라고 해요. 2005년 한국에 진출한 이후 꾸준히 성장했지만, 최근 2년간의 성장률은 폭발적이에요. 이솝 코리아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20년 매출은 547억, 21년 매출 914억으로 연평균 성장률이 86%에 달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오프라인에서의 고객 경험에 공 들이는 이솝의 매출 성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온라인 채널에서의 활약 덕이 큽니다. 이솝의 베스트셀러인 '레저렉션 아로마틱 핸드밤'은 카카오톡 선물하기 판매량 상위 3위 내에 꾸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비대면으로 선물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며 얻은 호재였어요.
그럼 그간 오프라인에 집중한 이솝의 브랜딩은 잘못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솝의 뛰어난 제품과 고객서비스, 브랜드가 가진 철학을 꾸준히 패키지와 매장을 통해 구현해 둔 결과가 온라인 매출을 통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만원 대의 작은 핸드크림이 인기 선물 아이템으로 등극한 데에는, 이솝이라는 브랜드 후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온라인 시대에도 오프라인 브랜딩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프레데리크 세일러는 매거진B 인터뷰에서 "매장에서 제공하는 진실한 서비스를 지키는데 가치를 두면서 더 쉽게 제품을 살 방법을 제공하겠다"고 목표를 밝힙니다. 사실 쉽게 쇼핑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대부분 개발돼 있죠. 하지만 그것을 오프라인과 균형을 맞추며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브랜드는 아직 없어요. 이솝이 과연 그것을 어떻게 해낼지 궁금합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02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