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소리 없이 내린다. 바닥이 젖어가며 소리를 낸다. 하늘 맑은 여우비가 세차게 내린다. 사람은 젖어가면서 무슨 소리를 내는가. 한낮에 낀 반그림자가 방 안을 회색으로 물들었다. 이런 날에 생각나는 이가 하나 있다.
때는 아직 무르지 않은 초가을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복지관에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활자를 봤는지 자판을 봤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여간 복지사 선생님이 나를 불렀기에 나는 금방 글을 덮고 자리를 옮겼다. 방문상담이었다. 사회적으로 위태로운 사람을 돕는 것이 사회복지사의 일이라면 방문상담이야말로 사회복지사 업무의 첨단에 있는 일이다.
위태로운 사람은 위험하다. 자신을 해칠 수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은 언재든 타인을 해칠 수 있다. 요컨대 칼 끝 방향의 차이였다. 그래서 위태로운 사람을 만날 땐 혼자 만나선 안 된다. 동행자가 아무것도 못 하는 보릿자루이더라도 머릿수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들은 할 일이 많으니 저기 앉아 있는 사회복무요원을 데려가는 것이다.
《이번 환자는 누구인가요?》
《정신적으로 위태롭고, 알코올 중독이 있는 환자입니다.》
《이력은요?》
《두 번 알코올 중독 치료로 입원 한 기록이 있습니다.》
《환자분, 맞으신가요?》
《예, 첫 번째 병원은 지옥 같았어요. 안에서 무얼 하던, 갇혀있다는 느낌이 견딜 수가 없었지요. 의사 분, 간호사 분들도 고압적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반면 두 번째 병원은 꽤 괜찮았어요. 안에서 할 일도 많고, 의사들도 친절했고... 하지만 이젠 병원이라곤 치가 떨려요. 아무리 좋더라도 다신 입원하고 싶지 않아요.
... 제 이야기를 더 해드릴게요. 저는 나쁜 쪽으로 일을 하다가 사업이 연이어 망해 알코올 중독자가 돼 버린 사람입니다. 친했던 동료들 역시 같은 처지이고요, 새로 사귄 친구들도 전부 중독자입니다. 저저번 주에 한 놈이 자살을 했어요. 사실 저도 금방이라도 창 밖으로 뛰어들고 싶은데, 약을 먹어가며 고만고만 살아가고 있지요. 저번 달엔 밥을 안 먹고 술만 먹다가 죽을 뻔도 했는데, 복지관에서 밥을 갔다 줘서 죽진 않았지요. 사는 낙이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 뭣 하나 할 수가 없네요. 약이요? 안 먹은 지 좀 됐습니다. 약을 먹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기분도 별루구. 뭐, 약을 안 먹어도 뭘 못 하지만요.》
우리는 결국 약을 먹으라 신신당부하고, 밥을 좀 가져다준 후 발을 옮겨야 했다. 한껏 젖은 사람은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세상을 적시려 한다. 혹시 지금 비가 오는지, 손을 펼쳐 만져보면 빗방울은 만져지지 않는다. 우산을 펼쳐도 빗방울을 만질 수 없다. 그를 따라 젖어도 만질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섬세한 핀셋도 그 빗방울을 만질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