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영화 ‘꿈의 제인’을 보았다. 해당 영화의 주인공 제인은 트랜스 여성이며, 여러 명의 가출 청소년들과 함께 살아가는 캐릭터다. 제인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케이크가 세 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그 대사와 함께 내 기억 속 저편에 있던 한 추억이 재생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 부모님은 가게를 운영하시느라 나와 동생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없으셨다. 하지만 학원을 늦게까지 보낼 돈의 여유는 가득했다. 그 은총으로 나와 내 동생은 밤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각종 학원을 매일매일 참 바쁘게도 다녔다. 그 때도 땅거미가 짙게 내린 저녁이었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출출하던 차에 같이 학원에 다니던 어린이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엄마가 친구들이랑 오뎅 사 먹으라고 돈 줬어. 우리 같이 먹자!”
이 어린이는 재림예수인가, 어쩜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나,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 아이들과 함께 분식 트럭으로 향했다. 날이 막 쌀쌀해지던 시점이어서 그런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은 정말 맛있어 보였다. 오뎅꼬치 하나를 잡고 입에 넣으려는 순간 그 어린이는 루시퍼의 얼굴을 하고 내 꼬치를 빼앗았다.
“미안한데 우리 엄마가 오뎅 세 개 살 돈만 줬어. 그래서 넌 못 먹어. 그냥 오뎅국물만 마셔.”
그 분식 트럭 앞에 서 있던 어린이는 나 포함 4명이었다. 어떤 기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오뎅꼬치 파티원에서 제외되었다.
지금의 나였으면 이 상황이 참 더럽고 치사해서 그 자리를 바로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뎅을 먹고 있는 어린이들 옆에 서서 묵묵히 국물을 마셨다. 그 와중에 건더기가 먹고 싶어서 무 한 토막도 종이컵에 야무지게 담았다.
어른이 되어 그 때의 어린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봤다. 난 그저 그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비록 오뎅꼬치는 먹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친구 사이로 인정받고 싶었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난 당시 함께 있었던 아이들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과 외로움만큼은 어제 있었던 일처럼 강렬하다.
난 가끔 이 대사를 곱씹어본다.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케익이 3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내가 만약 제인이었다면 혹은 내가 만약 그 아이였다면?
내가 제인이라면 케이크 세 조각을 열두 조각으로 만들어서 인당 네 입씩 먹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였다면 오뎅 대신 떡볶이 한 그릇을 사서 한 입씩 나눠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뎅국물을 대여섯 컵 마셨을 거다.
물론 어린이에게 이런 유연한 사고를 기대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하지만 이런 유연함을 어른이 되어서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차라리 다 같이 안 먹고 말지 아니, 차라리 내가 안 먹고 말지. 시시한 중년이 되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당시 그 어린이는 어떤 중년이 되었을까? 지금 내가 글로 적고 있는 이 에피소드를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제외하기보단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법을 궁리할 수 있는 그런 어른으로 자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