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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날 제대로 모셔준 빨간우산피자

by 피존밀크




심심한 어느 밤, 이럴 때 내가 잘하는 행동은 ‘배달의 민족’ 둘러보기다. 한참 둘러봐도 입맛이 돌지 않는다. 그러던 중, 내가 쓴 리뷰를 관리할 수 있는 버튼이 보여 클릭한다. 내가 적어 내려간 수많은 리뷰 중, 눈에 띄는 리뷰가 있다. 먹음직스럽게 찍힌 피자, 그리고 의미심장한 리뷰글. 이건 리뷰라기보단 사장님에게 보내는 편지글 같았다. 왜냐면 당시의 난 아래 사진과 같은 일을 당해버려서, 그에 대한 소감을 꼭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요즘엔 뜸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배달의 민족을 집요하게 이용했었다. 한 달에 20회 이상 주문해야 도달할 수 있는 ‘천생연분’ 등급을 몇 년간 끊이지 않고 유지했다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겠지? 그렇게 허구한 날 주문을 하다 보니 나만의 배달 단골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식은 영이네 집밥, 술안주는 투다리와 크라운호프 뭐 이런 식으로.


피자는 단언컨대 ‘빨간모자피자’였다. 이 가게의 피자는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좀 투박하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에겐 고든램지 피자를 이길 수 있는, 그런 소중한 피자였다. 바로 내가 생애 처음으로 먹어본 피자맛과 매우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난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피자’라는 것을 먹어봤다. 밀가루 맛이 날 정도로 두껍고 기름진 도우, 토마토소스와 각종 토핑의 어우러짐 위를 용암처럼 덮어버린 피자치즈. 뜨끈한 피자를 하나 떼서 입 안에 넣으면 고소, 시큼, 느끼함이 함께 탭댄스를 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얇은 씬도우와 간결한 도핑, 피자 치즈의 흔적만 남아있는 이태리 피자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피자 역시 맛있다. 화덕 피자 특유의 불향, 간결한 피자 토핑과 신선한 치즈의 조화가 참 깔끔하다. 하지만 난 두꺼운 밀가루 도우가 기름에 바싹 구워진,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치즈를 자랑하는 팬피자가 진짜 피자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나의 취향은 소수인지 요즘 잘 나가는 피자집은 이런 피자를 딱히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단골집, 빨간우산피자는 내가 어릴 때 먹었던 그 추억의 맛을 정확히 구현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격도 저렴했다. 그리고 주문하면 30분 안에 집 앞에 도착했다. 그래서 난 이 피자집에 점점 빠져들었고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주문해서 먹었다.



하지만 어느 밤에 발생한 비극으로 인해, 난 내 단골집에 별 3개짜리 리뷰를 남기게 되는데…






토요일 밤 9시, 난 배가 고팠다. 뭘 먹을까 머리를 굴리는데 머릿속에 빨간우산피자가 떠오른다. 입맛이 싸악 돈다. 근데 지금까지 영업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영업시간을 살펴보니 무려 밤 10시 마감이다. 안심하고 주문버튼을 눌렀다.



밤 10시. 이상하다. 평소 30분이면 배달 완료 메시지가 오는데 오늘은 1시간이 지나도 영 기별이 없다. 배달의 민족 배달현황을 살펴보니 여전히 배달 중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쯤 되니 배달라이더가 우리 집으로 오던 중 사고가 났나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주문한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사장님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거기 이미 출발했는데? 도착했어요!!



전화를 끊고 현관문을 열어보니 피자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피자를 먹으려고 보니 피자가 차갑다 못해 돌이 되었다. 딱딱한 돌이 된 피자를 하나하나 떼어내서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다 보니 뭔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편안한 야식을 즐기고 싶었는데 갑자기 웬 조리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난 늘 배달메시지에 ‘바닥에 놓고 벨 눌러 주세요.’를 쓴단 말이다. 근데 초인종 소리는커녕 노크소리, 문자 알림, 앱 도착 알림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는 라이더의 실수였지만 가게 사장님의 신경질적인 태도 때문에 불똥이 그분께 튀어버렸다.



해당 가게는 리뷰를 남겨도 딱히 피드백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뭔가 분풀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별 3개짜리 리뷰를 아래와 같이 작성했다.





오래간만에 맛집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손절하게 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도 또 주문하면 호구 인증이니 그냥 새 피자집을 찾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차피 후기 안 보시는 거 같으니 딱히 타격감도 없으시겠지?







다음 날, 일요일 낮 12시. 난 자고 있었다. 근데 낯선 번호의 전화가 나의 늦잠을 깨운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주인공은 어제 그 피자집 사장님이다.


사모님, 주무시는데 죄송해요.(낮 12시였는데… 여태 자빠져 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인트로) 어젯밤에 주문이 몰리면서 너무 바빴고요. 배달을 우리 남편이 하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배달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냥 바닥에 내려놓고 온 모양이에요. 다음에 주문하시면 스파게티나 너겟 드릴게요. 그러니까 화 풀어주세요.



일단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화풀이를 하기 위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에서 신나게 쉐도우 복싱을 했는데 무려 사과전화까지 받아버렸다. 어젯밤 일은 여전히 짜증 났지만 어쨌든 사과를 하시지 않았는가. 그래서 전화를 끊은 후, 후기를 삭제했다.



하지만 굳이 그 집에서 또 주문하고 싶지 않았다. 작은 동네지만 천지에 널린 게 피자집이고, 재주문하면서 ‘저번에 배달사고 났던 집입니다. 스파게티 주신다는 약속, 꼭 지키세요. ’이딴 멘트를 적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돼지지만 나름 자존심은 있단 말이다!





근데… 약 6개월 후, 저 빨간우산피자가 너무 먹고 싶은 것이다. 자존심 상하긴 했지만 저 일은 무려 6개월 전에 있었던 일이다. 사장님도 나와의 일은 잊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문을 했다.



주문접수가 되고 몇 분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으니 배민 관련 전화라는 안내음이 나온다. 혹시 오늘 배달이 힘든가란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안내음이 끝나니 저번에 통화했던 사장님이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사모님, 저번에 벨 안 눌렀던 그 집이시죠? 드디어 재주문하셨네요. 그동안 기다렸어요. 저번에 약속했으니까 약속 지킬게요. 스파게티 드실래요, 너겟 드실래요?



엥? 혹시 우리 집 주소를 어디에 적어놓으신 건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이 상황,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나 혼자 시켜 먹는데 웬 스파게티? 한사코 거절했지만 사장님은 집요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스파게티를 청했다. 그리고 곧 피자가 도착했다. 배달 시작할 때, 도착 직후에 안내문자가 왔다. 이 정도면 거의 대기업 AS급이다.






피자는 내가 평생에 걸쳐 그리워했던 그 맛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먹어본 피자오븐스파게티도 참 맛있었다. 둘 다 참 맛있었지만 먹는 내내 참 머쓱했다.



내가 만약 저 사장님이었으면 어땠을까? 일단 사과했고 사과를 받았다는 의미로 손님이 후기를 삭제했다면, 그냥 앞으론 조심하자~ 이러면서 나라는 손님은 잊고 살았을 것 같다. 근데 이 사장님은 아니었다. 그냥 흘리듯 했던 약속이었는데 그걸 지키려고 하시는 모습이 참 대단해 보였다. 반면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장사하실 수 있었던 거겠지.



피자와 스파게티를 다 먹고 후기를 남길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글을 남겼다. ‘저 이제 괜찮아요.’라는 메시지를 사장님께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이 후기 뭐지? 싶었을 것 같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았을까. 이 후기를 적은 뒤로도 난 가끔 빨간우산피자를 시켜 먹곤 했다. 스파게티나 너겟을 더 주는 이벤트는 없었지만 어쩐지 출발 및 도착 시 문자는 꼭꼭 날아왔다.



이제 난 이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땅엔 내가 사랑하는 두껍고 기름진 피자가 없다. 하지만 난 아직도 빨간우산피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고객과의 작은 약속도 잊지 않고 꼭 지키고자 하는 어느 노포 피자집 사장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그분의 피자를 먹어볼 수 있겠지? 내가 직접 대면하여 포장주문하는 그 날까지 빨간우산피자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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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