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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Dec 11. 2020

감각의 상실
- 디자이너의 의무에 대하여

  광고를 한 번도 안 보고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광고는 모든 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당장 명절 때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편의점조차 없는 시골에도 옥외 광고든 현수막이든, 오래되었든 새것이든 광고가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을 생각해도 이렇게 많은데 사람이 많은 곳은 어떨까? 하루에도 수십 번, 주에 수백 번 광고가 보일 것이다. TV와 핸드폰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넘길 뿐이지 매 순간. 그러나 그 영향은 낮게 취급된다. 평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괜찮을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생각해보라. 아무리 무관심한 것이라도 실생활 속에서 계속 접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거기다 휘황찬란하게 꾸미기까지 했다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고, 자신도 모르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기억하게 된 이상,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 예전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더라도 갑자기 그 제품이 유행하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박탈감을 느낀다. 이는 극소수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에게 효과적인 마케팅 중 하나다. 이 마케팅은 대다수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광고주로서는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고 봐야 할까? 정말로? 굳이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방식을 유지해야만 할지 우리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디자이너가 이런 작업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은 디자이너의 길을 걷는 학생으로서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이 길을 가는 데 있어 작업이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그게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광고라면 응당 예쁘고 멋진 연예인이 나와서 제품을 추천하는 것이 훌륭한 예시라고. 그런 것밖에 본 게 없었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간혹 기발한 광고도 있었지만, 그건 십여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회자가 될 정도로 드문 것들뿐. 연예인이 없는 광고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으니, 광고는 연예인의 화보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에 대해서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다. 연예인의 유무와 차이만이 광고의 모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자인에 대해 공부하고, 광고에 대해 알아보고 나니 그 시선이 뒤집혔다. 흔한 광고인 술과 담배가 아니더라도 얼마나 많은 광고가 어린 시절부터 존재했던지. 언제부터 광고의 영향을 받아 ‘멋있는 사람의 제품’, ‘성공하면 사는 제품’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산타클로스도 이빨 요정도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걸 믿는다니. 하지만 산타클로스와 달리 자본주의의 환상은 잔인하다. 광고를 본 아이들이 끊임없이 환상을 가지고 비교하며 잘못된 가치관과 열등감을 가지게 하니까. 그렇게 아이들이 부모에게 사달라고 조르고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 제품을 사는 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끔찍하게 완벽하고 섬세한 전략이다. 제품을 광고하기 위해 사람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깎는다. 사람들의 결핍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충족감을 판매하는 전략은 지금까지 너무 성행해왔고, 어느새 실생활에 녹아들었다. 어린아이가 광고는 모두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건 여덟 살 무렵이라고 한다. 북미의 경우 10살 정도면 일련의 면역성이 생겨 어린아이의 감수성을 잃는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심지어 아이들이 성장해 청소년이 됐을 때도 광고는 여전히 있다. 그 시기 청소년들은 너무나도 쉽게 영향을 받아 위험하다. 아무리 광고의 수법을 안다고 한들 분위기에 휘말려 하나, 둘 사면 습관이 된다. 습관은 버릇이 되고, 그렇게 어른의 몸에 정착한다. 그 후는 지금의 사태가 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라도 습관에서 벗어나기는 힘겨운 법.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고질적인 문제는 참 고치기 어렵다. 여러 가지 상황과 세월이 얽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니므로 단계적으로 조치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처음 손대야 할 건 무엇일까. 나는 제일 먼저 디자이너의 책임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생각보다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얼마나 많은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용으로 디자인된 가위나 손잡이에 불편을 겪었던가? 생각지도 못한 계단 턱에 출입하지 못한 유모차나 휠체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 둘은 디자인을 아주 약간만 바꾸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작은 경사로, 구멍의 크기 하나만 조절하면 되는 문제들. 그런데도 너무나 오랜 시간 불편을 겪어온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점이 언급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불편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배려나 경각심이 부족한 게 느껴지는가? 그저 사회나 대중의 문제로만 넘어갈 게 아니다. 제품을 만들어내고 구상했을 디자이너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디자이너가 먼저 그런 배려와 경각심을 강하게 지녔다면 과연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을까? 그 제품의 파장을 인지해야만 했다. 이에 대해, ‘미처 생각지 못했다’라는 말은 변명조차 될 수 없다. 디자이너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디자이너는 디자인할 때 어떤 영향을 주기 위해 작업한다. 그것이 작품에 대한 인상이든, 제품에 대한 호감이든 말이다. 그러니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정도는 괜찮다고 여긴 것이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태도다. 특정한 고객이나 대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생각지 못한’ 영향은 계속 사회에 퍼진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의 심정은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런 상태가 일부에서만 나타났다면 심각성이 이미 문제시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빈번해져서, 그것이 문제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야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치려고 애쓰고 있지만, 광고의 양상은 여전하다. 누군가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고, 오래되어 온 문화와도 같으니 굳이 바꿀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한 것부터가 문제이다.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나쁜’ 디자인이다. 다른 표현 방식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굳이 그런 방식을 써야 할까? 디자이너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주제이다. 디자이너는 인간의 감각에 영향을 끼친다. 색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제품을 사야 할지 말지, 이미지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사람은 보이는 걸 ‘트렌드’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친구, 교사, 부모님에 뒤지지 않고 많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나 다름없다. 그 영향의 크기만큼 책임도 져야 하는 건 당연지사. 적어도 진정한 디자이너라면 광고 디자인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바꾸려 노력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실행하는 것이 낫다. 심지어 선악이 분명한 길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다. 더 많이 고민하고 도전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 걸음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 디자이너는 언어의 한계를 넘은 세계의 창조주다. 그만큼 디자인 세계의 영향은 정말 커서, 책임감이 필요하다. 이미 사례는 충분히 나왔다. 얕은 생각 하나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차별과 불편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려면 창작이 너무 고달파질지도 모른다. 너무 틀에 갇힌 생각만이 나오기 쉬운 환경이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책임감을 놔 버리면, 그 피해는 모든 사람이 받게 된다. 책임감의 무게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조금씩 나아가보자. 우리가 어린 시절 본 광고 같은 건 흔적도 없이, 멋진 디자인으로만 채워진 세계는 정말 멋있을 테니까. 우리 세대와 달리 매체의 디자인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자. 그걸 직접 만들어 나가자. 그 길은 조금 험난할지라도 언제나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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