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윤 Oct 18. 2021

우리가 지금 배워야 할 세계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을 읽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이 상황이 변하고 나서 전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구는 걸 의미하는 구절. 어릴 때는 이 속담만큼 불쾌한 속담이 없었다. 너무 오만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멍청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난 과거를 잊을 수 있지? 어떻게 자신의 시간을 부정하고 오리발을 내밀 수가 있지? 어린이다운 고집과 깨끗한 정의에 따르면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언제부터 저 속담의 개구리가 되었을까.     


어린 시절이 없는 어른은 없다. 인생이 두 번째인 사람이 없듯 어린이였던 적 없는 사람은 없다. 다들 세상이 처음이었고, 작았으며,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은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진다. 20살이 넘어가면 잊히는 마법이라도 있는 걸까? 어른이 되면서 자신은 언제나 예의 있고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하며, 늘 어른이었던 것처럼 군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그랬다. 과거가 있었기에,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단 걸 떠올리지 못했다. 그건 어쩌면 지금의 내가 너무나 흡족해서, 서툴렀던 시절을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걸 앞에 두고서 그 이전의 과정을 보고 싶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린 내가 생각했듯이 오만하고 멍청한 태도다. 과정을 떠올리지 않고 결과만 바라보는 사람은 과정의 가치를 모른다. 결국 결과를 만드는 건 과정임에도, 결과만을 바라보니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리 없다. 그게 한 사람의 인생이어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라는 과정을 가볍게 보면서 어떻게 좋은 사회, 좋은 어른이 되길 바라는가. 말이 되질 않는다.     


사실 나름대로 이만하면 괜찮은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왔다. 어린이의 시선을 알게 모르게 얕봤던 일, 괴롭히는 게 귀엽다고 웃었던 일, 어린이를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으로 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일…. 특별히 어린이에게 거칠게 굴거나, 날카로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이를 한 존재로 존중했느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힘들다. 그냥, 정말 보통 어른들이 어린이를 대하듯 대한 것 같은데, 그게 보통이라고 올바른 건 아니지 않은가. 책에 나온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또 그 이야기를 하시는 작가님을 보며,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내 지난 행동들이 어땠는지 되새기는데 선명하지도 않아서 더 부끄러웠다. 어린이들은 내 서툰 짐작보다도 훨씬 똑 부러졌고, 맑았고, 따뜻했다. 상대에게 존중을 받으면 그만큼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받은 행복을 나누려 했고, 사랑을 주는 법을 알았다. 어른이 했더라면 당신은 성인이라고 온갖 칭송을 받았을 행동들을 어린이들은 숨 쉬듯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점은 그저 그 아이들이 나이가 더 적다는 것뿐인데.     


어른에게는 어른의 사정이 있다는 걸 안다. 어른에게 왜 어린이처럼 못 하느냐고 따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린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바르고 배울 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게다가 그렇게 멋진 아이들은 앞으로 살 날이 많아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우리가 이 뻔한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면, 모두의 미래는 훨씬 희망으로 가득할 거다. 좋은 환경과 사회가 제공된다면 얼마만큼의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비단 금전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서로 간의 배려와 예의, 존중이 가득한 세상이 어린이들에게 주어진다면? 그러면 정말 무서운 속도로 세상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런 세상을 하루빨리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어른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어린이들이 그 훌륭한 태도를 잘 갈고닦아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돕는 것도 어른들의 의무다. 좀 거창하게 들리지만, 아마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배려와 존중 약간이 그 어떤 마법보다도 황홀할 거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내가 그 살아있는 증인인지라 잘 안다. 어릴 적 어른들이 어린 나를 ‘하나의 존재’로 인지해주시는 건 무엇보다 강렬했다. 늘 아기, 어린애, 성인의 절반 정도의 존재로 있는 나를 ‘1인분’으로 인정해주시는 게. 정작 그런 존중을 받았던 나는 과연 그런 존중을 주고 있나 반성하게 된다. 그 옛날의 어린이의 기쁨을 잊은 채 산 게, 나뿐만은 아니겠지만.     


말이 길어졌지만, 사실 한 마디로 정의될 이야기다. 좋은 세상이 오길 바란다. 

어른이건 어린이건 모두가 행복한 세계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어른인 사람들이 지금 봐야 할 것이, 다름 아닌 ‘어린이라는 세계’가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안정감을 바라는걸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