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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29. 2022

꽃다발 아닌, 나무

REAL flower-소설 <비밀의 화원>에 나온 장미

장미는 인기 많은 배우와도 같다. 소설이든 영화든 상관없다. 장미의 자리는 언제나 비워져 있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째서 그토록 친근할 수 있는지…. 그러다 알게 되었다. 장미는 종교권에서도 사랑둥이란 걸 말이다. 서양권에서 꽃의 여왕으로 여겨져서인지, 신화 속 아프로디테를 이어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한다. 심지어 이슬람권에서도 장미의 대우는 남다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땀에서 장미향이 났다고도 하고, 오스만 제국시대 한 신부의 잘린 목에서 장미향의 피가 흐르자 군중들이 그리스도인, 무슬림 가릴 것 없이 그를 성인으로 공경했단 이야기가 내려올 정도다. 그런 종교의 우호적인 시선 덕분인지, 장미는 색깔부터 개수에 이르기까지 의미가 세분화될 만큼의 상징성이 여전하다. 자세히 들어가면 동양권과 서양권에서 약간은 다른데, 대표적인 것 몇 개를 골라 소개한다.


1송이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11송이는 ‘누구(10)보다도 당신(1)을 사랑합니다’

99송이는 ‘영원한 사랑’

100송이는 ‘100%의 사랑’     


어떤 꽃이 개수에 따라 이런 섬세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하물며 오늘날 현존하는 것들만 6~7000종임을 증명하듯 색마다의 의미도 따로 존재한다. 종류가 다양하고 화려한 데다, 나름의 메시지도 있으니 선물하기엔 최고다. 조금 더 특별한 선물을 하면서 마음을 드러내기엔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제법 잘 자라는 편이니 쉽게 길러 장식할 수도 있다. 평범하단 느낌이긴 해도, 그만큼 전형적인 로망이다. 어쩌면 호불호가 안 갈려서 망설임 없는 선물이었던 덕에 장미가 꽃의 여왕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원에 가득한 장미.>

물론 그게 장미의 모든 등장 이유를 설명해주진 않는다. 작품마다 장미의 가치는 다른 법이니까. 예를 들어 <비밀의 화원>은 등장부터 색다르게 장미를 다룬다. 앞서 꽃다발을 먼저 떠올린 것처럼 우리는 살아있는 꽃보다 꽃다발에 더 길들여져 있다. 그런 인식을 깨듯 황무지의 저택에선 장미 나무 정원이 등장한다. 아이와 아버지를 남기고 죽은 어머니의 흔적이 가득해, 버려지고만 정원이 말이다. 고아 소녀 메리가 저택에 오면서 변화는 일어난다. 으스스하고 밋밋하던 저택에는 활기가 돌고, 정원 역시 그 생동감에 함께한다. 벌써 몇 년째 버려져 잊혔던 공간이지만 그 정원에는 여전히 장미와 식물들이 있다. 외로웠던 아이들은 비밀의 화원에서 성장하며, 슬픔과 상처로부터 회복해 간다. 그러다 죽은 부인의 부탁을 성실하게 지킨 정원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장미 묘목을 받아 새로 심는다. 그 묘목을 심는 건 변화를 가져온 메리도 아니고, 황무지의 아들인 디콘도 아니다. 죽은 어머니의 상처를 이기고 나아가는 콜린이다.      


그 장면이 시사해주는 의미는 크다. 디콘과의 첫 만남이나 콜린의 발작만큼 충격적인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가족이 행복했던 시절을 되돌리는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한 꽃을 건강해진 자식이 심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생기를 잃었던 정원과 아이가 다시 밝아지고 있다. 어머니가 장미 꽃다발을 좋아했다면,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지진 못했을 것이다. 꽃다발은 이미 꺾은 식물에 불과하니 시들고 죽는 게 세상의 법칙이 아닌가. 장미 나무는, 정원은 다르다. 하나의 시작이고, 존재고, 누가 돌봐주지 않아 초라해져도 꿋꿋이 살아있다.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할 때 꽃다발을 선물하고 많은 가족이 정원을 함께 꾸민다. 그게 연인과 가족의 간격이 아닌가 싶다. 가족은 지금만이 아니라 미래도 있어야 한다.  

    

장미의 전설에선 가족과는 다른, 연인의 모습이 보인다. 구두쇠 향수 상인의 딸 '로사'는 자기 집 꽃밭에서 일하던 바틀레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바틀레이는 아침마다 꽃밭에서 꽃을 따서 향수를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좋은 향수 한 방울씩만 모아다가 로사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바틀레이가 전쟁터로 불려 나가게 되자 로사는 바틀레이의 일을 대신했는데, 연인이 했던 것처럼 가장 좋은 향수를 한 방울씩 모았다. 헌데 전쟁 후 다른 사람이 상자 속에 담긴 바틀레이의 유해를 전해주자, 로사는 연인의 죽음이 서러워 그간 모았던 귀한 향수를 유해에 모두 뿌려버렸다. 이를 본 아버지가 홧김에 유해에 불을 질러버렸는데, 하필 옆에 있던 로사가 그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후 그 자리에서 꽃이 하나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장미였다.      


과연 로사와 바틀레이가 가족이었어도 저런 결말을 맞이했을까. 콜린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미칠 듯이 상심했지만 결국 살아갔다. 가족이 있었으니 살아야 했다. 연인이라 하여도 가족과 다른 점이 분명 있다. 그런 점을 비밀의 화원에서 장미로 암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은 꺾인 꽃처럼 시들기 쉽지만, 가족은 나무처럼 뿌리를 단단히 내린다. 그게 꽃다발과 나무의 차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장미는 집집마다 담벼락에 피어있다. 그 풍경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가정의 인상을 선물한다. 꽃을 피우는 정성과 그 꽃과 함께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피어있는 꽃송이 하나마다 저마다의 사연에, 나름의 행복과 사랑이 있다. 그러니 담긴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은 일 같다. 장미향은 언제나 풍겨오는 법이니, 한 번쯤 제대로 맡아보길 추천한다. 이왕이면 물이 아닌 흙과 함께한 장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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