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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05. 2022

피로 물든 하얀 장미

REAL flower-소설 <나이팅게일과 장미>의 장미

장미는 인지도가 탄탄하다. 전 세계에서 장미는 기본적인 꽃으로 여겨지고 큰 호불호를 타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두’가 좋아한다. 다만, 때로 ‘모두’가 선호한다는 건 좋은 이야기가 아닐 때도 있다. 가까운 예로 연산군은 장미를 좋아하여 전국에서 모았다고 한다. 잘못 알려진 예시지만, 로마 황제가 연회에서 너무 뿌려 시종들을 질식시켰단 꽃도 장미꽃이었다. 더군다나 색깔별로 의미가 다른 장미꽃 중, 노란색과 검은색은 불길하다. 각각 이별과 집착, 질투,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작품에서 이 두 장미는 부정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꼭 그 법칙을 지켜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색은 긍정적이고 대중적인데도 참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나이팅게일과 장미>의 장미가 그 주인공이다.    

 

이 동화는 흔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붉은 장미를 요구하는 아름다운 아가씨와 가난한 청년으로 말이다. 절망한 청년이 붉은 장미를 되뇌며 울부짖자, 작은 새인 나이팅게일은 안쓰러워한다. 어떻게든 도와주려 장미나무를 돌아다녔지만 발견하지 못했고, 나이팅게일은 하얀 장미에게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러자 한 방법을 알려주는데, 바로 나이팅게일의 심장을 찔러 장미를 물들이는 것이었다. 나이팅게일은 멈칫했지만, 결국 사랑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 아침에 일어난 청년은 붉은 장미에 환호하며 아가씨에게 가지만, 아가씨는 보석을 준 청년도 있다며 무례하게 내친다. 분개한 청년은 장미를 마차에 내던져 버리고, 책을 읽으러 가버린다. 장미는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사건의 발단인 동시에 독자에게 허망한 성찰을 선물하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온몸을 희생한 나이팅게일.>

우리는 붉은 장미의 의미를 보통 열정적인 사랑으로 해석한다. 많은 작품에서 그 의도를 사용하고, 그 법칙을 따른다. 평범한 구애도 아니고 생명과 사랑의 결정체인 장미가 이런 홀대를 받는 건 아주 드물다. 동화에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작가를 생각해보니, 그리 별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작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스카 와일드다. <행복한 왕자>의 아버지 말이다. <행복한 왕자>에서는 더없이 선행을 하는 동상과 제비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몸을 버려가며 행복을 나누어 주었지만, 남은 건 차가운 납 심장과 시체뿐이었다. 마지막에 천사가 둘을 천국으로 데려갔다 해도 보통처럼 마냥 행복한 마지막은 아니다. 다른 작품도 온전히 가벼운 행복이 등장하지 않는다. 못생긴 난쟁이가 조롱을 칭찬이라고 착각하다가 자신을 보고 충격받아 죽거나, 오만한 폭죽이 쏘아진 이후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곤 한다. 작가가 이런 태도를 취한 건 동화의 정의를 달리해서다. 그는 동화가 어린이를 위해 쓰인 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읽도록 쓰인 것이라고 보았다. 본디 세상은 동화처럼 늘 착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런 마지막을 비꼬면서 사회를 비판한 것이다. 작가의 생각을 참고하면 순수와 숭배를 의미하는 하얀 장미가 하필 피로 물든 게 의미심장하다. 그는 순수한 사람들의 피를 열정으로 치부하는 현실을 비꼰 것일지도 모른다.     

<피로 물들게 되는 하얀 장미.>

이는 엉뚱한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장미는 많은 권리 투쟁에서 상징으로 쓰였다. 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권운동가들이 즐겨 사용해 왔단 말이다. 그들의 구호는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였는데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인간의 존엄성을 뜻했다. 이런 예시는 나이팅게일의 희생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많은 사회에서 사랑을 요구한다. 하지만 가장 강렬하게 사랑과 희생을 촉구하는 곳은 개혁하고자 하는 집단이다. 개혁 자체가 잘못되진 않았다. 세상은 그런 개혁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 왔으니까. 한데 그런 개혁 과정에서 가장 손해를 본 건 지도자들이 아니다. 진정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이들은 함께 운동하다가 쓰러진 희생자들이다. 이들을 추모하고 기린다고 그들이 돌아오진 않는다. 게다가 간혹 이런 희생을 치른 과정에서 부정한 거래가 드러나기도 한다. 더 좋은 세상, 보다 바람직한 권리, 그걸 위해 온몸을 바친 결과가 과연 그만한 의미가 있던가.     

 

작중 청년은 사랑을 갈구한다. 그 수단으로 붉은 장미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굳게 믿는다. 그건 착각에 불과했는데도 그는 맹목적으로 의견을 쏟아낸다. 심지어 그는 ‘공부하는’ 청년이다. 공부보다, 다른 성과보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애달픈 마음을 토한다. 나이팅게일이 ‘저런 사랑’이면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 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원의 다른 동식물이 비웃는 사이에 하얀 장미는 나이팅게일과 함께 청년을 도왔다. 장미는 계속 정원에 남아있기라도 하겠지만, 나이팅게일은 두 번 다시 노래할 수 없다. 정원의 모두를, 슬픈 청년의 가슴까지도 울렸던 그 노래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그런데 청년은 그런 나이팅게일의 심장으로 빚어낸 장미를 가차 없이 내던진다. 아가씨에게 면전에서 거절당했기 때문에 말이다. 청년과 아가씨, 나이팅게일과 장미를 사람으로 치환해보면 이 과정은 생각보다 눈에 익다.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장담할 수 없는 가치를 위해 희생하라고 촉구했던가. 지도자들은 꼭 살아남아 빛나는 인생을 산다. 위인전으로 남고, 후손이 발견되고, 제사가 지내지고, 기념일이 생긴다. 희생자들은 이름 없는 숭고한 피의 일부로 남을 뿐이다.      

이 모든 비극은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현재의 우크라이나를 봐도 보이는 이야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국민들은 고통을 함께하고 있다. 굶주림, 폭탄, 피난, 징집…. 어느 하나 합당한 가치인 것들이 없다. 특히 러시아 군인들은 지도자의 명령 아래 나라를 위한다는 이유로 스러져간다. 눈물짓는 그들의 모습은 꼭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듯하다. 아마 많은 나라의 내전에서도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죽음이 어떤 이면을 가지는지 안다. 더 이상 피로 물든 장미가 늘어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붉게 물든 장미 정원은 하트 여왕의 정원으로 충분하다. 이 세상에 현존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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