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2013년 作)>는 정말 화려한 작품이다. 끝없는 사치와 보석의 광채가 시선을 빼앗았지만, 제일 화려한 장면은 데이지와 개츠비가 재회하는 순간이었다. 주인공(닉)의 거실에 꽃이 가득한 풍경은 그 무엇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름 모를 화사한 꽃들이 가득 들어차는 건 등장하는 내내 황홀했다. 나중에 꽃을 알아보니 그 이름은 다양했지만 의외로 다 한 종류였다. 모두 난꽃이었던 것이다. 꽃 하나하나의 꽃말까지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느낌이었다. 미인, 말괄량이, 귀부인, 당신을 사랑합니다, 애정의 표시, 행복이 날아오다…. 이런 상황에 쓰라고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사치스러운 데이지와 화려한 서양란들은 완벽한 그림을 자아내고 있었다. 개츠비의 노력은 연인과 관람객 모두에게 먹혔던 셈이다. 하지만 저 두 꽃의 대비는 개츠비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꾸며진 꽃을 보며 황홀해하는 데이지.>
<위대한 개츠비 中 데이지와 개츠비의 재회 장면.>
다른 작품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둘의 사랑은 행복을 암시했을지도 모른다. 꽃말에 연인의 마음을 경제적, 심미적으로 증명해주니 트집 잡을 게 하나도 없다. 분명 완벽하게 아름답기만 해야 정상이었다. 아주 희망에 빠지라고 날 떠미는데도, 그런 안도로 이끌어주지 못한 건 ‘데이지’였다. 연인의 이름이 꽃 이름인데 수년만에 만나는 상황에서 왜 다른 꽃을 준비하는 건가. 이름을 모르는 인연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때 떠오른 것이 감독의 안배였다. 데이지의 꽃말은 다름 아닌 ‘희망’과 ‘평화’다. 두 사람에게는 절대 올 수 없는 결말이기에 데이지 꽃은 끼어들 수 없었다. 둘은 고백과 애정, 잠깐의 행복만이 한계였다. 둘이 함께하는 희망도, 평화로운 일상도 헛된 꿈에 불과했다. 거기다 색상의 의미를 더하면, 거실의 꽃과 개츠비에게서 보이는 흰색은 ‘순수’를 뜻한다. 처음엔 순수한 이끌림이었어도 더 이상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둘의 마음 역시 점점 순수와는 멀어질 테니까. 예민하고 까다로운 난초의 등장은 순수하지 않은 덕에 만난 역설적인 운명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우연인지 장치인지는 모르지만, 데이지와 서양란 두 꽃의 전설은 두 연인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마치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와 만든 인물들처럼 느껴질 정도다. 데이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난초는 베트남 전설에서 나오는 것까지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표현한 듯하다. 두 전설을 보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리라 믿는다.
<데이지꽃의 모습.>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과수원의 신 '베르담니스'는 숲 속 요정 중 가장 예뻤던 베르디스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러나 이미 약혼자(혹자는 남편)가 있던 베르디스는 숱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다. 그러나 꾸준한 구애에 약혼자와 베르담니스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오랜 기간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다 차라리 꽃으로 변해서 이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에 베르디스는 꽃의 여신 플로라에게 부탁하여 꽃이 되었고, 이 꽃이 바로 데이지다.
<난초의 일종으로,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한 덴드로비움>
호아란이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으나 거만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이용하기만 했고, 그런 태도에 실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들도 많았다. 이에 분노한 사랑의 신이 한 사람만 사랑하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그녀에게 저주를 걸었고, 호아란은 뭉카이라는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매일 그를 유혹하나, 뭉카이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면서 그녀의 유혹을 거절한다. 이에 실망한 호아란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마녀를 찾아가 부탁한다. 마녀는 뭉카이가 다른 여자를 생각하지도 못하게 할 수 있다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다음날 그를 찾아갔으나 이미 흑단나무로 변한 채였다. 화난 호아란은 그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마녀는 한번 효과가 난 마법은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호아란은 울면서 흑단나무가 된 뭉카이를 밤새 끌어안았고, 결국 흑단나무 근처에 꽃으로 변했는데 그게 바로 난초라고 한다.
<난초의 일종으로, 개츠비에 등장한 팔레놉시스>
피장파장이라고 하던가. 데이지나, 서양란을 준비한 개츠비나 어쩜 이렇게 전설을 빼닮았는지 모르겠다. 이걸 운명의 짝이고, 인연이라 볼 수 있다면 천생연분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천생연분이 존재하는 법이다. 개츠비와 데이지를 보면 악연도 인연이란 말이 떠오른다.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서양란과 소박한 데이지, 불운한 전설을 품은 두 꽃, 그 전설과 너무 닮은 두 사람. 영화는 의상상을 수상할 만큼 황홀경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지만 연인은 그렇지 못했다. 둘의 사랑은 난초의 사랑이었다. 까다롭고 고운 환경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그 명칭은 데이지를 향한 그의 사랑 덕분에 붙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글쎄, 그의 사랑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꽃이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극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