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윤 Apr 18. 2022

황수선화, 우리의 롤모델

REAL flower-영화 <빅피쉬>에 나온 황수선화

모름지기 청혼이라면 꽃은 필수다. 호불호 없는 선물이지, 향기 좋지, 정성도 들어가지…. 딱 정석 중 정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핵심은 상대가 ‘좋아하는’ 꽃이다. 모범적인 사례가 영화에도 떡하니 자리한다. <빅피쉬(2003)>다. 작중 주인공의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은 첫눈에 반한 사랑을 설득하기 위해 황수선화 1만 송이를 심는다. 황금을 녹인 것 같은 그 장면은 관객 누구 하나의 이견 없이 명장면이라 손꼽을 정도다. 황홀하다시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그 모습을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파란 하늘 아래 황수선화 꽃밭 속 젊은 연인은 미치도록 낭만적이었다.     


<영화의 포스터. 젊은 에드워드 블룸과 산드라 블룸의 모습.>

만약 그 장면이 장미나 백합과 함께했다면 이렇게 인상깊진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흔한 모습이 바로 떠오를 테니까. 배우와 꽃들의 매력으로 예쁘기야 했겠지만, 기억에 남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빅피쉬>의 그 광경은 황수선화여서 사람들에게 확실한 잔상을 남길 수 있었다. 고백받는 여인 산드라의 머리카락이 금발이어서 감독이 황수선화를 골랐을지도 모른다. 그 조합은 완벽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황수선화의 의미가 꽤나 다채로웠다.      


수선화와 얽힌 전설만 해도 볼 게 많다. 흔히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로 알려진 신화를 기억할 것이다. 수많은 여인들을 울리다 결국 자신과 사랑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를 말이다. 희한하게도 이런 신화가 없던 동양에서도 수선화에 대한 인식은 유사하게 나타난다. 수선화(水仙花)라는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선’이 다름 아닌 물에 사는 선녀 혹은 신선을 의미하지 않는가. 자신의 모습을 보느라 물가를 떠나지 못해 그 자리에서 죽은 나르키소스가 절로 연상된다. 제주도에선 설중화(雪中花)라고도 불렸는데, 눈이 오는 12월에도 꽃을 피웠기 때문이란다. 그 탓에 말마농(말이나 먹는 마늘; 쓸모없는 잡초)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이는 제주도에만 국한된 일이었다. 추사 김정희가 좋아해 중국에서 수입해 와 다산 정약용에게도 선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김정희가 유배되어 제주도에 왔을 때 그 귀한 수선화를 말마농 취급하는 걸 보고, 그게 꼭 유배된 제 처지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스스로를 수선화에 겹쳐 보며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신화와 야사란 차이에도 동서양 상관없이 닮아 있는 메시지가 느껴진다.    

 

이런 의미가 있는 꽃을 에드워드가 가져온 것엔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는 가족에 대한 사랑도 넘치지만, 자기애 역시 대단한 인물이다.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모험으로 이루어진 걸 보라. 일이 바쁜 탓에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기 위해서라곤 해도, 모든 가장들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진 않는 법이다. 실제로 운명의 여인인 산드라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늘 패기 넘치게 위기에 맞서왔다. 당당히 마을을 떠나고, 거인을 돕고, 단장 아래 허드렛일도 감수하며 기회를 기다렸단 말이다. 그런 그가 하필 약혼자가 있는 여인에게 반하는데, 자기애 때문인지 굴하지 않는다. 타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기는커녕 수선화 꽃밭으로 감동을 주며 구애한다. 그 과정에서 수선화를 짓밟으며 약혼자와 뒤엉켜 싸우기까지 한다. 자기애로 인해 맞서는 일들이 모두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걸 배운 셈이다. 다른 게 아닌 인생을 뒤흔드는 사랑과 결혼이라는 상황에서 수선화가 하나의 성장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 싶다. 실제로 이후 에드워드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기애로 인한 교훈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기껏 준비한 꽃이 짓밟히고 얻어맏기도 하지만, 에드워드는 결국 사랑을 얻는다.>

본래 서양에선 수선화 한 송이를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의 신호로 여겼다고 한다. 굳이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쟁취하는데 황수선화가 쓰인 건 이런 신호를 정면에서 부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도 이야기에서도 애정이 돌아오게끔 말이다. 물론 ‘황수선화’의 노란색의 의미도 역시 따로 존재한다. ‘사랑에 답하여’, ‘연모’, ‘애정 복귀’‘내 곁으로 돌아와 주세요’…. 상당히 직설적으로 구애하는 의미들이다. 황수선화는 1월 2일의 탄생화이기도 한데, 새해 다음날의 꽃답게 담긴 패기가 어마어마하다. 워낙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기에 그런 날과 어울린다고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수선화의 자기애를 곱게 보지 않았다. 자만한 걸 경계했던 시절이니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이제는 여러 의미가 뒤바뀌는 것처럼 수선화도 다르게 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황수선화의 찬란함이 얼마나 눈부신가. 그 비법은 어쩌면 자기애 그 자체일수도 있다! 물에 비친 자신의 자태를 누리며 고결하게 뽐내는 건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으로 보인다. 요즘 사람들은 온 세상의 눈치를 보다가 병이 생기기 일쑤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어찌 다뤄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다. 우리는 에드워드의 광채 조금이라도 닮을 필요가 있다. 황수선화가 에드워드에 이어 비결을 슬쩍 읊조려주는데, 이대로 흘려 넘기기엔 아까운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데이지일 수 없었던 난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