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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Feb 22. 2021

파리, 점심 그리고
인생으로 하이라이트

<파리에서의 점심-엘리자베스 바드>를 읽고

사람은 정말 ‘아는 척’을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 유독 자신이 알거나 경험한 것과 관련된 것이면 흥분하는 특성이 빛나니까. 특히 나는 그게 유별나다. 흔히 말하는 ‘설명충’이 되는 사람인 셈이다. 좋아하는 분야, 관심 있는 분야, 아는 분야에 대한 건 정말 신이 나는 법이라 별다른 방법이 없다! 물론 이런 성격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 한 번의 경험으로 다양한 발돋움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파리 여행을 갔다 온 후 파리 관련 책에 눈이 가는 이번 경험처럼.  

    

작가는 파리에서의 점심을 이야기했다. 이야기의 주제나 다름없었기에 신기했다. 누군가는 파리는 미식의 도시가 아닌가, 그다지 신기하진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여행 가기 이전이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다. 직접 한 경험은 그걸 아주 제대로 바꿨다! 개인적으로 파리의 ‘토종’ 음식점의 요리는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작가는 어떤 걸 먹고 무엇을 느꼈길래 파리에서의 점심으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는 걸까? 내 파리에 대한 음식 평가는 싱겁고, 디저트로 사과 파이가 많이 나오며, ‘에스카르고’가 맛있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크루아상과 빵이 정말 윤기가 흐르는 일품이지만, 그 외에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러니 흥미로울 수밖에.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길 대화로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이번에 느낀 것인데,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취향이 다른 사람과 실제로 이야기하면 때때로 갈등을 빚을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통해 보는 건 평화롭다. 나와 다른 생각과 인식을 받아들이게 도와준다. 이런 차이는 내가 감정적이고 반언어적인 표현에 민감해서 그럴 수도 있다. 모든 이가 똑같은 경험을 하긴 어려우니까. 그렇지만 나에게 한정된 아주 드문 경우라도, 그 화목한 간접 경험은 내가 활자 중독증을 의심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게 만든다. 거기다, 책에 대한 호감은 작가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작가 엘리자베스는 미국인이지만, 과거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나와 유사하다.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현대극보다 사극을 애청한다. 현대 의상의 유행은 몰라도 한복이나 궁중 의복을 구분하는 데 한때 도가 트기도 했다. 과거를 보며, 온갖 역사를 친숙하고 즐겁게 습득한 바 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국적이 다른 쌍둥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잘 통했다. 다만 국적은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뭐랄까, 역시나 ‘미국인’이었다. 나는 미국과 한국이 유사하단 점이 있다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서비스 정신과 빠른 일 처리와 식성, 자신의 인생 추구와 목표 정신은 한국과 다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 미국은 미국. 기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그녀는 아메리칸 정신과 아메리칸드림을 체화한 사람이었고 그런 미국인에 대한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 시선을 나 역시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가 스스로를 ‘미국인’이라 칭하며 얘기하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와 인상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레시피에는 미국 친지의 음식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미국 특유의 음식이라 할 만하거나 미국식 요리라 느껴지는 것은 적었다. 한국인 저자였다면 못해도 김치 대용 식품이나 얼큰한 요리 두어 가지쯤은 기본으로 나왔으리라. 미국인 작가라는 점을 알고 있어도 그런 아쉬움이 순간적으로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뿐이랴. 시장이 아니라 한인 마트가 주로 등장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점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글에서 신선함을 주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레시피보다 파리와 미국의 문화 차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세상에. 나는 왜 의사에게 병에 관해서 묻지 않는지 엘리자베스와 함께 돌아버릴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점원들은 그런 식으로 손님들에게 반응하며 재판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미국은 고소나 소송에 있어 과한 면이 있지만 파리는 너무 여유 넘치고 흐지부지하다고 느껴졌다. 파업이 많다는 것 역시 내가 기겁하도록 만들었고, 낯선 이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례라고 하는 건 약간 게거품을 물 것 같았다. 친구를 만드는 게 그토록 오래 걸리면 한순간의 말동무도 어렵단 말인가. 미국의 조건 없는 다가감도 단점은 있겠지만 상당히, 파리보단 낫다고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요리를 통해 파리로 다가갔고, 요리와 함께 파리에서 살았다. 그녀가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안 되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녀가 시장에 가고 더 요리에 대해 집중한 약간의 ‘신경’에 대해 감사한다. 그녀의 요리는 나에게 큰 인상을 못 주었지만, 그 요리가 있는 그녀의 인생과 생각은 나에게 파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의 주인공은 요리였지만 그녀의 인생이 더 눈에 들어왔다. 연극에서 굳이 주연만 봐야 하는가. 더 마음에 닿는 조연이 있으면 그 조연의 연기에 감사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면 될 일이지. 나는 그녀의 요리가 아닌 요리를 담은 인생이 너무나 예쁘고 뜻깊고 공감되어 응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먹어본 요리를 먹으러 다시 파리로 갈 수 있길 바란다. 더불어 그녀가 얻은 파리에서의 문화 경험도 함께해 더 좋은 경험이 되기를. 그때는 파리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넓게 이해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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