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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Feb 28. 2021

속은 건 내 진심이었지,
잘못이 아니다

속아왔던 경험, 진심에 대하여

언젠가 학교 어플인 에브리타임에 한 글이 올라왔다. 유명 BJ와 합방을 하게 되어 떨린다며 열심히 해온 보람이 있다는 글이었다. 나는 누가 쓴지도 유명하다는 BJ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성과를 냈다니 괜히 대견했다. 뭐라도 해 주고 싶어 댓글을 달았다. 유튜브도 쉽지 않은 판인데 열심히 했구나, 잘됐다, 축하한다, 응원한다고. 그런 성공이 너무 대단하고 멋있어 보였다. 또래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처럼 느껴져서였을까? 주위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 떠들곤 했다. 주변의 성취에 기뻐서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희열과 기분은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선명한 기쁨은 흔치 않은 법인데...

누가 알았을까. 그 좋은 일이 나한텐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거라고.     


학교의 수업 중 거짓말에 대한 수업이 있었다. 거짓말의 영향과 반응에 대한 것이었다. 그 글은 수업의 과제였다. 그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응원한 게, 소망한 게 모두 헛짓거리였구나. 그건 너무 슬프고 억울한 일이었다. 허무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아주 작은 일이었고, 나에게 피해도 없었다. 주변은 내게 그러게 왜 온라인상의 말을 믿느냐고 했다. 다른 사이트나 인터넷이었다면 나 역시도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 학교 학생들만 쓰는 앱이었다. 타인이지만 아주 타인도 아닌 사람들. 성공한다면 축하하고 힘들다면 위로하고 싶은 사람들이니 내가 안 믿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너무 함부로 진심을 줬구나, 그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세상이 무서워지고, 진심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너무 사소한 사건을 너무 크게 본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어떤 과장도 없이, 나는 그때 그 사건만으로 우울함에 침잠했다. 사과문에 댓글을 달고, 개인적인 사과 쪽지도 받아 마음은 풀어졌지만, 상처가 사라지진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내게 준 흉터는 아직도 내 몸에 선명하다.     


아마 내가 이토록 그 사건을 기억하는 건, 속이는 것에 예민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나는 유별났다.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워낙에 눈치가 없어서일까? 내게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 건 간에 나는 그 말을 일단 듣는다. 문제는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한다고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그 사람이 어떤 의도가 있든 간에 믿는 순간 상대의 편이 된다고 해야 할까. 참… 이렇게 보니 속이 없어 보인다. 너무 속을 훤히 내보이고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성격이 세상 살기에 힘들다고 들은 적도 많다. 사실 뻔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은 얼마나 많은가.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의 철학을 가진 미친 인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과격한 표현이지만, 이외에 적합한 표현이 없다. 저 표현이 생긴 이유는 실제로 그런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이라면 몰라도 굳이 평소에 진심을 내놓고 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손해 보는 사람만 힘들어하니까. 

피해자는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를 겪는데, 가해자는 잘못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때론 세상에 불문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억울하고 용납할 수 없는 그런 규칙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더 떵떵거릴 것, 사람들이 헷갈리게. 

상처를 입어 힘들다면 혼자 견뎌낼 것,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다행히도 이 불문율은 점점 표면에 드러났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이를 진심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게 트렌드로 여겨지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선은 확고해지고, 지인에 대한 선은 더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걸 알고 있어도 실행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상상해보라. 당신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같이 밥을 먹는 친구와 함께 밥을 먹는 도중, 친구가 자신이 심장이 아파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당신은 이 말을 믿을 것인가?      


누군가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을 것 아니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보라. 당신은 6살 정도 아래의 사촌 동생이 있다. 예뻐하는 동생이고, 사이도 좋다. 그런 동생이 어릴 적 심장에 구멍이 있어서 수술한 적이 있다면, 친구의 이야길 흘려들을 수 있을까? 아마 일단 경직될 것이다. 너무 놀라서 반응도 잘 나타나지 않은 채, 머릿속에 전쟁이 난 듯 혼란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이미 친구의 말이 거짓이라는 전제가 사라진 셈이다. 이 흐름은 ‘일단 믿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 이전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고가 전제된다. 알고 있거나 경험한 게 많다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진리가 있다. 세상은 넓고, 무슨 일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것.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기사의 주인공이나, 자살했다던 누군가가 내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이 난 집이 우리 집일 수도 있다! 때론 진실이 거짓보다 잔혹하지 않던가. 거짓말 같은 현실을 몇 번 보고, 경험을 몇 번만 쌓아도, 터무니없는 말을 지나치지 못한다. 작은 것이라도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 반드시 극적인 비극이나 충격이 필요한 건 아니다. 나는 천운 이게도 살면서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은 적이 없다. 감정을 어찌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싶지만, 행복하고 원만하게 살아왔다 자신한다. 나보다 더 힘겨웠던 이도 무너졌던 이도 넘쳐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변화를 느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은 ‘어떤 말이든 완전히 허무맹랑한 건 없으며, 무슨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걸 내게 제공했다. 타인이든 지인이든, 그런 깨달음에 예외는 없다. 그러니 진심을 아끼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사실 정말 힘든 일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차라리 내가 속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다. 그냥 나 하나 좀 속상하고, 토라지고, 억울하다가 풀어주면 그만인데. 만약에 만약에 하나 사실이면 가볍게 취급한 게 너무 죄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더 진심을 아끼기가 힘들다. 혹여 내 가벼운 반응에 상처 입을까 봐. 그 과정에서 몇 번은 정말 속은 것에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영락없이 그 상처를 안고 살 팔자인가 보다. 호되게 당해서 가끔 불쑥불쑥 감정이 올라오는데도 변하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혹 속은 것에 상처 받고, 진심으로 대한 것에 배신당한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정말 사람이 많아서 그만큼 꿍꿍이나 의도가 많다. 그걸 파악하지 못한 건 순수한 본인의 잘못이라고 하기 어렵다. 운이 나빴을 수도 있고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했다면 당할 수 있는 법이니까. 당신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건 상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그저 진심으로 대하고 싶을 뿐이어서일 수도 있다. 착하다 나쁘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진심을 표현하는 게 더 좋고, 그 진심이 타인에 의해 상처 받는 아픔을 알아서 믿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참 많이 속았다. 정신적 심리적 피해 이외에 경제적 피해는 없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당신도 그렇게 속아왔다면, 당신의 진심은 더 외향적인 성격일 뿐이다. 더 잘 드러나고 더 잘 표현해주고 더 다가가고 싶은 진심. 그저 그에 불과하다. 지나친 자책도 걱정도 하지 말자. 우리의 진심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흉터가 있다고 그 빛이 바래진 않는다. 우리가 속았던 만큼 진심에 의해 감동한 순간도 있으니까. 

속은 경험에서 배울 건 배우고, 진심은 진심대로 다듬어서 표현하면 된다.

우리는 속았다. 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것도 잘못도 아니다. 

그냥, 모든 것이 진심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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