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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01. 2021

내 청춘의 순간은
낯선 박수가 가득했다

박수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청춘에 대하여

박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짝짝짝’하는 단순한 소리를? 이상하게도 어떤 칭찬보다 단숨에 기분이 고양되는 그 소리를 누가 꺼릴까. 그렇게 좋아하는 박수지만, 많이 받았기에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좀 겸연쩍다. 사실, 박수를 받아본 적은 손에 꼽힌다. 상장을 받거나, 생일 축하할 때가 아니면 박수는 쉽게 나오지 않으니까. 약간의 경탄과 축하와 의무감으로 받는 박수임에도 그 수가 참 드물다. 그러니 순수한 감정만으로 타인에게서 박수를 받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런 박수는 유독 무대 위에서 받기 쉬운 법이다. 그 매력에 무대 위의 인생을 결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걸 보면 박수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지 않은가? 박수의 힘은 아주 강렬하고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주, 아주 특별한 박수를 받은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은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체육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겐 체력장으로, 누군가에겐 그냥 수행평가로 알려진 날. 유연성을 비롯해 많은 신체 능력을 검사하는 날이었다. 암만 건강과 활력이 넘치는 10대라지만 그런 넘치는 테스트는 사양이기 마련. 대부분이 대강대강 하고 넘어가려는 건 여고의 흔한 분위기였다. 사실 공부를 밤 10시 넘어서까지 하는 마당에 건강하기까지 바라면… 어휴. 너무 욕심이 많은 거다. 체육으로 대학을 갈 애들을 제외하고 그 시간에 열정적인 사람은 몇 없는 게 당연했다. 체육 시간에 열심히 한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눈에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조금 똑똑히 군다면, ‘적당히’ 하는 게 최고였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나는 모든 걸 잘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수학도 국어도 영어도 다 잘한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걸 잘하기가 어디 쉬운가! 하나만 잘해도 어깨가 펴질 땐데! 그런 주요 교과목 대신 모든 과목에 열심히 임하는 게 내가 취한 자세였다. 체육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이 설렁설렁 넘어가려 하니, 더 의욕이 솟기도 했다. 그게 잘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저 그런, 중상위 정도의 실력이었다. 아예 몸치는 아니지만, 반에서 가장 잘하는 아이들 순위에 들지도 않았다. 참 빠지기도 열심히 하기도 모호한 위치였지만 어쩌겠는가. 

조금만 올라가면 한 분야에서 상위권에 들 수 있어 보였다. 답은 하나였다. 열심히 할 수밖에!     


오래 달리기는 가장 아이들이 꺼리고, 싫어한 종목이었다. 계속해서 달려야 하니 뻔하다면 뻔했다. 날은 더웠고, 운동장은 넓었다. 운동장 전체를 돌아야 하는 오래 달리기는 가능하다면 빨리 끝내고 싶은 종목이었을 뿐이다. 나 역시 제발 처음 기록이 좋기를 바랐다. 한 번에 끝낼 수 있도록. 그때의 기록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는 건 조금의 아쉬움이 남았단 점이다.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넘어가려면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는데 내 미련은 생각보다 컸다. 그게 너무 아까워서 결국 나중에 재도전한 것이다. 그 재도전이, 나에겐 몇 안 되는 박수의 성취일 줄은 몰랐다.     

 

더운 날이었다. 재도전인 만큼 달리는 아이도 몇 명 없었다. 달리다가 중도 포기하는 아이도 대다수. 다 같이 달린 기본 기회와는 차이가 엄청났다. 분명 같이 달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샌가 보면 없었다.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혼자 달리고 있었다. 나는 체육계도 아니었고, 체육 우수자도 아니었다. 그냥 한 번 더 도전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어떻게 보셨을까. 별로 의미도 없는 성적 올리겠다고 계속 달리고 있는, 그렇다고 기록이 좋은 것도 아닌 학생의 외로운 달리기를. 어떤 선생님이었다면 그만 하라고 말렸을지도 모른다. 괜히 체력을 깎는 일이기도 하고 학생이 멈추는 순간 선생님도 그 종목을 마무리할 수 있으니까. 무의미하고 미련한 발버둥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나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선생님은 그저 지켜봐 주셨으니까. 묵묵히 별말 없이 보고만 있으셨다. 혼자 남아 조금 망설여졌던 길은 그 시선에 힘을 입었다. 멈출까 말까 고민했던 다리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만화나 영화처럼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거나 체력이 좋아지진 않았다. 힘든 고통 대신 쾌감이 자리하지도 않았다. 숨이 차서 배가 너무 아팠다. 그렇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끝을 보고 싶었다. 하기로 했으니까. 결과가 어떻든 끝은 봐야지. 오로지 그 생각으로 나는 계속 달렸다. 누군가 봤더라면, 안쓰러웠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자세가 무너질 지경이었을 테니까. 시간이 되어 온 체육부 애들이 기억난다. 운동장 전부를 내가 달리고 있어 구석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혼자 뛰는 모습을 그 애들은 어떻게 봤을까? 이해할 수 없었을까?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아직도 그때의 그 속마음은 모르지만,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떻게 봤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되새겨봐도 정말 힘들었다. 팔다리에 힘이 다 빠졌던 게 아주 생생하다. 하지만 다 달린 순간, 그 마지막 선을 넘은 순간은 잊을 수 없다. 감히 잊지 못한다. 반 아이들도 땡볕을 피해 다 체육관에 있던 그때, 박수가 나에게 쏟아졌다. 달린 걸 다 봐준 체육부와 선생님의 박수였다.      


텅 빈 운동장, 박수받는 대상은 한 명. 흑백 영화에 갑자기 박수 소리로 총천연색이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해 준 박수도 아니고, 엄청난 성취도 아니었는데. 온몸은 힘들고 기다려준 친구도 없어 좀 외로웠는데…. 그 모든 걸 박수가 감싸줬다. 그 순간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혼자 끝까지 달린 친구에 대한, 체육을 일생으로 삼은 친구의 응답이었을까? 공감에서 우러나온 경탄? 칭찬?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건 분명 나에 대한 지지였고 내가 달린 것에 대한 포상이었다. 청춘이란 예쁜 울림과 어울리지 않는 고등학교였지만, 나는 그때 내 청춘의 시간을 함빡 누렸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청춘이었다. 푸르고 반짝이는 연녹색과 햇살의 장면.


그 기억은 많이 마모된 학창 시절 기억임에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나는 그때 정말 사람의 한순간은 영화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말 한마디 없이도 박수가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도. 그 이후로 나는 손뼉을 칠 수 있을 때마다 진심으로 한다. 받는 사람이 그 진심을 느끼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내 잊을 수 없는 그때의 박수 소리처럼 당신도 이 박수에 영원한 위안과 성취감을 느끼길 바라며. 누군가의 청춘 조각에 내 박수도 있길 바라면서.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 순간을 꼭 경험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늘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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