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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양 Oct 27. 2015

디버깅 하던 노인

방망이 깎던 노인 패러디

일정과 품질의 사이에서 고민과 아쉬움에 통탄하는 이들을 위하여..


벌써 4년 전이다. 내가 갓 기획팀에 배정된지 안 돼서 개발팀에 내려갈 때다. 사업팀 회의 참석하는 길에, 욕이라도 안 먹으려면 허접한 프로그램 기획과 프로토타입을 들고 가야했다. 마침 창가 건너편에 앉아서 F5를 누르며 디버깅 하는 노인이 있었다. 적당히 사업팀과 유저들을 현혹할만한 그럴듯한 프로그램 하나 출시하려고 아무거나 개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일정을 너무 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금방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프로그램 하나 가지고 일부러 질질 끌것소? 금방 나오길 기대하거든 다른 데 아웃소싱 하시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일정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만들어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F5를 누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돌려보는 듯 하더니, 날이 저물도록 이리 검증 해 보고 저리 검증 해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내보낼만한데, 자꾸만 더 디버깅 하고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참석할 회의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검증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소멸자 제대로 호출되야 메모리 반환이 되지, 종료만 했다고 할당된 메모리가 다시 돌아오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기획자가 좋다는데 무얼 더 디버깅 한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회의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회사 가서 알아보시우. 난 디버깅 더 하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회의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검증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더 늦어진다니까. 프로그램이란 실제 상황까지 제대로 검증해야지, 단위 검증만 해서야 쓰겠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그런데 이번에는 키보드를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중단점에 조건식을 넣고 메세지를 출력해서 각 케이스 별로 값을 확인해 보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마우스로 이 메뉴 저 메뉴 다 클릭하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프로그램이다.
회의 참석도 놓치고 다음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일정 못 맞춰봐야 개발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유저 본위가 아니고 개발자 본위다. 그래 가지고 야근 수당만 되게 부른다. 지 몸값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개발자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건너편 경부고속도로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개발자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가라 앉은 셈이다.
다음날 사업팀에 가서 프로그램을 내놨더니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야단이다. 기존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영업사원과 기술팀의 설명을 들어 보니, UI의 기능이 너무 현란하기만 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프로그램을 사용하다가도 경쟁사 프로그램에 비해 조잡하게 느껴지며, 기능이 너무 단순해 보이면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차별점이 너무 없어 보여 비싼 돈 주고 구매하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렇게 꼭 알맞고 버그 없는 프로그램을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이 프로그램도 굳은 결의와 비장한 각오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개발을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기획자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훌륭한 프로그램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법인카드로 소고기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 주말 출근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경부고속도로 건너 서판교를 바라보았다. 개인 주택 단지 옆으로 새로운 스타트업 회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스타트업들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디버깅 하다가 유연히 고속도로 건너편에 스타트업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임금피크제로 청년실업 문제의 고통을 분담하자는 공허한 슬로건이 생각났다.

시간이 흘러, 고객사에 방문했더니 유저들이 열심히 프로그램을 돌려보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전에 오래된 다른회사 구닥다리 프로그램 크랙으로 문제를 돌려보던게 생각났나 보다. 그러고보니 디버깅하는 모습을 구경한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F5 누르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경쾌한 기계식 키보드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년전 디버깅 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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