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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릭 Nov 01. 2020

시간이 가는 게 두렵지 않은 지금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피터팬 증후군

몸은 어른이지만 어른의 세계에 끼지 못하는 ‘어른아이’가 늘어나는 사회 현상을 반영한 용어. 경제적인 상황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독립이 늦어지거나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어른아이’에 머물 때 이들을 피터팬이라 부른다.

-심리학 용어 사전- 


나는 언제부턴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렸는데 호스피스에 대한 책이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삶에 관해 말하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가 순간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를 확 덮쳤다. 내일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 게 인간의 삶이라는 생각에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혼자 방에서 그 책을 읽고 있다가 불안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어서 엄마를 찾았고 죽음이 두렵다고 울면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고작 중학생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열 살 때 돌아가셨고, 친할아버지는 내가 세 살쯤 돌아가셔서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책을 읽으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는 사실과 함께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날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시간이 흘러가는 게 두려웠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고등학생이 되는 게 싫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대학생이 되는 게 싫었다. 익숙함을 벗어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게 싫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처럼, 시간이 거꾸로 흘렀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스무 살에는 마치 향수병에 걸린 거처럼 고등학교 시절을 계속 그리워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끊임없이 과거를 떠올리며 과거 속에 머물러 지냈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그리지 못했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며 늘 버릇처럼 후회하는 말이 입에 붙어있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충실하지 못하고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어쩌면 나는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에서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다. 대학교 선배들의 리얼한 취업 이야기를 들으면서 겁이 났다. 나는 취업이라는 전쟁터에 뛰어들기에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군인이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취업’의 과제를 저만치 미뤄두고 싶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나는 뭘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다양한 경험과 휴식을 갖고 싶은 마음에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1년을 휴학했다. 체력도 키우고 마음도 건강해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취업의 압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1년의 ‘자유’는 내게 너무 짧았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모은 돈으로 난생처음 미국에도 다녀왔는데 별로 한 게 없어 보였다. 내 삶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휴학생의 신분은 학교 시험과 과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남들의 삶과 비교하면서 자유를 온전하게 누리지 못한 1년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복학하면서 열심히 4학년을 보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여름방학에는 몽골로 해외 봉사도 다녀오고 힘겹게 운전면허도 땄다. 2학기에는 노인복지관에서 학기 중 실습도 했다. 나름대로 알차게 보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스물넷의 한 해가 끝날 때, 뿌듯함보다 허무함과 내년을 맞이하는 막막함이 가득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취업을 해야 하는 스물다섯에는 진로를 고민하며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었다. 막연하게 해외에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은 생각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겁이 나서 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 뒷걸음질 치고 싶은데 한 살 두 살 먹는 나이가 얼른 정신 차리라며 나를 떠미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 하는 말들에 갈대처럼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렸다.


스물여섯에 취업한 직장에서는 초짜 신입의 미숙함으로 판판이 깨졌다. 일의 실수를 지적하는데, 나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자꾸만 마음이 무너졌다. 더 버틸 힘이 없어서 계약직 1년을 마치고 퇴사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한 해가 끝날쯤에는 항상 씁쓸하고 아쉬웠다. 이대로 한 해가 끝난다는 것이 허탈했다.


그리고 스물일곱. 준비 없이 퇴사한 상태로 또다시 막막함을 느낄 때, 갑자기 역류성 식도염에 심하게 걸려서 잔잔했던 일상생활이 뒤집혔고,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작년까지만 해도 12월이 가까워지는 하반기에는, 늘 버릇처럼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이렇게 됐어?”라고 말하며 불안하고 초조한 동시에 우울해지면서 씁쓸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올해 9월쯤 그런 내 생각이 조금 변화했다는 걸 발견했다. 달력을 보며 올해가 끝나가는 걸 실감했는데, 이상하게도 허탈하지 않았다. 시간이 가는 걸 두려워하고 과거를 후회하면서 살았는데, 오늘 내가 쓴 글이 한편씩 쌓여가는 걸 보면서 어느 순간 내일 쓸 글을 생각하며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내년에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꿈꾸는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고 나이를 먹는 건 싫다. 도대체 내가 가진 병은 언제 나을까 하는 답답함도 있다. 하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병은 분명 문제였다. 역류성 식도염은 10명 중에 1명꼴이라고 하던데 먹고 바로 눕는 행동도 하지 않는 내가, 왜 하필 내가 이 병에 걸렸을까 하며 괴로웠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돌아보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아픔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을 발견했고, 더욱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비교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시로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며 힘들었던 마음도 전보다 넉넉해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제로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 주어진 이 순간을 마주한다. 몸은 아프지만, 전보다 훨씬 마음과 생각이 건강해졌다.


문득 생각했다. 중학생 때 읽은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고. 인간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건 필연적이다. 나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지만 한 치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죽음 또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가려고 한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서럽게 울던 중학생 때의 나를 안아주며, 이제는 내일을 맞이하는 설렘이 있기에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지금이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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