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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릭 Oct 31. 2020

Nobody (feat. 원더걸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I want nobody nobody but you
I want nobody nobody but you
난 다른 사람은 싫어 니가 아니면 싫어  


2008년에 나온 원더걸스의 <Nobody> 노래 가사 중 일부다. <Tell me>, <So hot>에 이어 대히트를 쳤던 이 노래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나온 노래이다. 무려 10년이 넘었다. 중고생 때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면 자주 부르는 노래 중 하나였고, 학교에서 수련회를 가면 장기자랑 타임 때 꼭 등장하는 단골 노래였다. 나는 몸치였던지라(지금도) 춤을 추진 못했고 친구들과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신나게 흥을 즐겼다.

이제는 추억의 노래다

가사에서 ‘nobody’는 영어의 부정 주어로 ‘아무도(~않는다)’라는 뜻이다. 우리말 단어에는 1대 1로 대응하는 말이 없다고 하는데, 비슷한 단어로는 ‘아무나’를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처럼, 너를 제외한 아무나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뜻만 살펴봤는데도 왠지 모르게 절절한 느낌이 든다.


반대로 ‘everybody’는 ‘누구든지’라는 뜻으로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힙합 노래에서 자주 들어본 “Everybody put your hands up! (모두 손 들어)”처럼 모두를 지칭하며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튜브는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유튜버로 활동하며 자신이 업로드하고 싶은 영상을 마음껏 올릴 수 있다. 단순히 흥미로 시작했던 유튜브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더욱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전문적으로 동영상을 제작하는 기술이 없어도 구글 계정만 있다면 누구나 유튜버가 될 수 있다.


잉여 탈출이라는 뜻을 가진 ‘탈잉’도 마찬가지다. 탈잉은 세상의 모든 재능이 콘텐츠가 된다고 말한다. 이곳에서는 취미부터 실무까지 정말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클래스를 여는 ‘튜터(교사)’들이 있다. 전문적인 자격증이 없다 할지라도 내가 가진 재능과 노하우가 있다면 튜터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재능에는 값이 매겨져서 오프라인과 온라인 클래스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수강생이 튜터가 될 수 있고 튜터도 수강생이 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플랫폼이다.


내가 최근에 시작한 브런치도 마찬가지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브런치는 작가 신청을 통해 합격이 되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라는 메일과 함께 작가라는 매력적인 호칭이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작가로서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연재할 수 있다. 그러한 글이 차곡차곡 쌓이면 책으로도 만들 수 있다. 유명하거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제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유는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영상을 찍어 올려야 하고 탈잉은 튜터로서 수업을 준비해야 한다.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려면 글을 써야 한다. 예시를 세 가지만 들었지만,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생각만 하고 말로만 떠들어대면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요란한 빈 수레가 될 수 있다.


나 또한 계속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2018년 4월에 글쓰기 모임에 찾아갔던 첫날, 그 설렘과 기쁨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이 귀한 곳에 누추한 내가 있다니’ 이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삶에 치여서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고 참석을 못 하는 날도 있었다. 다행히 글을 못 써왔다고 해서 모임에서 쫓겨나진 않았다. 모임에 참석했다는 행동만으로도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다른 사람이 써온 글을 들으면서 열심히 자극을 받았다.


결론도 짓지 못한 글을 써갔을 때가 있었다. 그런 내 글이 부끄러웠는데 노력을 알아봐 주시고 잘 썼다며, 재능이 있다며 관심과 애정이 담긴 한마디, 한마디를 통해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키워나갔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올해 퇴사를 하고 나서였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집중력이 바닥이었던지라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쓴다는 자체가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꿈은 있었지만, 의지가 나약했기 때문에 홀로서기는 힘이 부족했다. 그런데 아는 언니, 동생과 함께 셋이서 소소한 글쓰기 모임을 만들면서 주 1회 한편씩 글을 쓰게 되었다. 약 5개월간 꾸준히 글쓰기 모임을 이어나가면서 글을 쓰는 근육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도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글쓰기로 나타난  같다. 교내에서 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은 아니었지만, 상을 받기도 하고, 백일장에 나가보기도 했다. 글쓰기를 통해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이 어린 나에게 제일 큰 보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아실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는 것이 나의 오래된 꿈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표현하고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어릴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나아가, 내가 쓰는 글이 나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위로하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많다. 우리는 너도나도 작가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 더군다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작가들도 이미 많다. 세상에는 이미 그런 작가들이 많은데 왜 굳이 내가 그 길을 가려고 할까. 나는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해봤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답은 너무나 간단하게 나왔다.



글을 쓰는 시간은 내가 살아나는 시간이다. 먼저는 내가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나에겐 글을 쓰는 시간이 치유의 시간이다. 내가 가진 상처를 어루만지며 글을 쓰고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아직은 나를 돌보는 데 서툰 어른이지만 글을 쓰며 나를 보듬어 가는 중이다. 내가 살아나면 상처 받은 누군가에게도 힘을 주고 위로해줄 수 있다.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아니라 살리는 말이 되기를 원한다. 살리는 글이 되기를 원한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나는 오늘도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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