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릭 Oct 09. 2020

그깟 레깅스가 뭐라고

분노

다행히 새로 산 베개는 숙면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경사진 베개의 부작용으로 허리가 아팠다. 평소에도 허리가 안 좋았어서 체형 교정도 할 겸, 그동안 하고 싶었던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먼저 그에 맞는 운동복이 필요했다. 동작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과 근육의 움직임을 알 수 있도록 달라붙는 티셔츠와 레깅스를 입어야 했다. 처음에는 레깅스를 입어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내 몸매가 드러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필라테스를 하고 싶었지만 미뤄왔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레깅스를 찾다 보니 운동복도 하나의 패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색상도 디자인도 다양했다. 나는 심플하고 깔끔한 디자인을 선호해서 그에 맞는 레깅스를 몇 개 샀고 입어봤을 때, 네이비 색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먼저 세탁을 하기 위해서 빨래통에 던져놓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잊어버린 것이 화근이 되었다.

     


토요일 아침, 엄마는 빨래통에 모아둔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그리고 나한테 빨래를 널라고 하시면서 외출하셨다. 탈수가 다 끝났다는 소리를 듣고 세탁기를 여니까 엄마의 바지 주머니에 종이가 있었는지 빨래한 옷들에 전부 하얀 종이 쪼가리들이 붙어있었다. 아, 진짜 이게 뭐야.

     

나는 그때부터 조금 성질이 났다. 동생은 게임을 하고 있는데 나는 빨래를 널어야 하는 상황도 불만스러웠다. 퇴사하고 백수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해야 하는 집안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열심히 게임하는 동생과 한가하게 TV를 보시는 아빠를 보면서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다. 두 남자도 집안일을 거들긴 하지만 그리 협조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투덜대면서 빨래를 털고 있는데 내 레깅스를 발견했다. 세탁하고 나면 더 깨끗하고 뽀송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하얀 종이 가루와 함께 먼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기분이 불쾌해졌다. 레깅스에 붙어있는 먼지를 털다가 중간 부분이 뜯겨서 심하게 보풀이 일어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서 내 눈은 뒤집혔다.

     

아직 개시하지도 못한 새 옷이었다. 보니까 그 레깅스는 손세탁해야 하는 옷이었는데 엄마가 보지 못하고 세탁기에 그냥 넣고 돌린 것이었다. 물론 나도 잊고 있었고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무조건 엄마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겨우 짜증을 억누르면서 옷에 보풀이 심하게 났다고 하니까, 지금은 통화할 수 없으니 이따 얘기하자고 하셨다. 알겠다 하고 끊었으나 올라오는 분노는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 속상했다. 새 옷이었고 마음에 쏙 들었는데 세탁으로 한순간에 옷이 망가지니까 너무 속상하다 못해 분노가 폭발했다. 그 분노는 마치 화산에서 마그마가 폭발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중인격자가 된 것처럼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악을 썼다. 집에는 헤드셋을 끼고 게임하는 동생만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터지는 것 같았다. 지칠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분노하는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3개월째 낫지 않는 역류성 식도염으로 계속해서 절제하고 참아야 하는 상황과 집안일에 비협조적인 우리 집 두 남자, 미래는 여전히 막막하고 무기력한 내 모습,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이 모든 일에 분노가 터졌다.

   

그렇게 목이 아플 때까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눈물까지 쏟았다. 스트레스를 받고 나니까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나쁜 습관이 다시 올라온 것이다. 이 기분으로 남은 빨래를 너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어서 동생한테 말하고 집 앞 마트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샀다.

     

그리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의자 같은 곳에 걸터앉았다. 일어나면서 먼지가 있을 것 같아 엉덩이를 털었는데 손에 끈끈한 게 붙었다. 이게 뭔가 싶어서 보니까 누가 먹던 껌을 붙여놔서 바지 엉덩이 부분에 붙은 것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진짜 오늘은 되는 일이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 와서 과자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만두도 튀겨서 먹었다. 오늘은 역류고 뭐고 없었다. 그냥 폭주하는 날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엄마가 오셨다. 아까 혼자서 지칠 때까지 분을 쏟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는지, 또 엄마에게 내 감정을 마구 쏟아냈다. 엄마 때문에 오늘 하루를 망쳤다며 한껏 부풀려서 엄마 탓을 했다. 처음에 엄마는 옷을 망쳐서 미안하다고 새것으로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엄마 말은 듣지도 않고 과하게 분개하는 내 모습에 “네 감정만 소중하고 엄마 감정은 소중하지 않냐”며 화를 내셨다.

     

맞는 말이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씩씩대면서 현관문을 쾅 닫고 집을 나왔다.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엄마한테 이렇게 화를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혹시 내가 분노조절장애인가 싶었다. 이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뭔가를 먹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 근처 카페에 가서 빵을 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1차원적으로 변한다. 기승 전 먹기다. 건강하게 풀면 좋을 텐데 내 몸을 해치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그것은 먹는 것뿐 아니라 분노도 마찬가지였다. 화를 낸 그 순간에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지만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나를 공격한다. 내 안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나를 파괴한다.


엄마와 다투기 전, 혼자서 분노가 폭발했을 때 '그깟 레깅스가 뭐라고. 고작 그 천 쪼가리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내 안의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감정의 소리에 빠져서 폭발하고 말았다. ‘빨래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못 입겠으면 하나 새로 사자.’ 하고 넘기면 될 문제였는데, 내 안에 올라오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니까 그것이 나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빵을 사 오면서 엄마한테 지나치게 화를 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다. 이렇게 돌아서면 죄송한 마음이 드는 일을 왜 반복하는지. 엄마한테 잘해드려야지, 하면서도 실수를 반복한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쭈뼛쭈뼛 어색하게 다가가서 용서를 구했다. 아까는 내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낸 것 같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감정 컨트롤을 못했다고, 죄송하다고. 얘기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이 났다.


엄마는 진심 어린 내 사과를 받아주시면서 엄마도 미안하다고 하셨다. 엄마와 화해를 하고 나니까 그제야 내 안에 휘몰아쳤던 소용돌이도 잠잠해졌다. 오늘 하루 종일 화를 있는 힘껏 냈더니 지치고 피곤했다. 그런 내게 고생했다는(?) 의미로 시장에 가서 닭강정을 사 왔다. 야식으로 3개월 만에 닭강정을 먹으니까 어찌나 행복하던지. 하루 동안 화내고 울고 웃고 혼자 난리를 쳤다는 생각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만 이렇게 먹자는 소용없는 다짐을 했다. 아무튼, 실수를 반복하는 게 인간이니까.

이전 06화 강제 집순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