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혹은 에릭 블레어가 내게 말했다 - 1부)
조지 오웰(George Orwell), 혹은 에릭 블레어(Eric Arthur Blair).
우리에겐 "동물농장" 혹은 "1984"의 작가로 알려진 작가. 어찌 보면, 조지 오웰의 글을 SF 작품인 듯, 혹은 풍자 - 우화 소설의 작가인 듯 이해하기까지 한다. 특히, "동물농장"은 청소년들이 꼭 읽어야 할 우화로서, "브레멘 음악대"와 마찬가지로 동물에 대입하여 이야길 하고자 했다. 물론, 그 동물들의 천국은 공산 혁명이 막 일어난 소비에트 연방을 상징하고, 돼지는 공산주의자 - 특히 스탈린을 상징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이게 되면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1984"는 SF지만 전제주의에 대한 경고를 알려주는 작품으로 인지하곤 한다. 결국 하나의 "독재정권"이 나타나게 되면, 한 사람의 생각, 언어, 대화, 시간 등등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며 - 그 결과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 및 가치까지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진리부"의 존재를 이야기하니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 이후 세대는 애플의 한 광고를 통해서 전율을 느낀다. 리들리 스콧은 애플 컴퓨터의 광고를 "1984"의 내용 중 일부를 차용하여 광고로 만든다. 당연히, 그 광고의 파급력도 대단했다.
조지 오웰은 성공한 풍자 작가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다양한 장소에서 읽고 - 읽히고 있다. SF 혹은 미래시대를 이야기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1984"는 하나의 틀로서 이해한다. 마치 "사이버 펑크"의 장르처럼, 이후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영화 : 리들리 스콧, 블레이드 러너)의 이미지에서 처럼, 1984에서 만든 미래 세계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하나의 각인이 되어 버렸다.
조지 오웰과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그래도 유전자 조작에 조직의 계층이 이루어지니 다소 희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의 문명을 경험할 수 있는 "야만인"들이 사는 공간으로 공간을 불리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는 아무리 조직과 계층을 분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능적인 쾌락의 근원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소마라는 중독성이 약한 마약과 의도적인 가상 임신 체험 장치, 성적인 행위 등을 통해 인간의 쾌락을 극대화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존재"가 그 존재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통제를 한다.
하지만 1984의 계층은 어떠한가? 하위 계층만 문화를 공유한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맥주와 매춘, 그리고 과거의 문물들을 경험하고 있으며, 상위 계층은 철저한 억압과 통제 속에 그들의 삶이 마치 선택되어 움직이는 존재로서 세뇌를 한다. 당연히, 방송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세뇌"하는 시스템은 이 작품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언론을 통제한다. 그 통제된 언론의 인과관계를 맞추기 위해 과거의 자료를 바꾼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와 동맹이고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른다. 목표치 달성이 어렵다면 그 목표를 조작하면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원래 목표는 그거였다."라는 세뇌를 통해 다른 말을 못 하게 한다. 당연히,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끊임없는 "관찰"과 "감시"때문이다. 그러니, "1984"의 아이콘은 "감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감시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1984"의 빅브라더를 차용해서 설명하곤 한다.
이 작품의 영향력은 정말 너무나 컸다. 그래서, 이후 다양한 소재로서 본 내용의 주재를 차용한다. 가장 극단적인 패러디 및 풍자는 "테리 길리엄의 브리잘(한국 개봉명 : 여인의 음모)"가 있다. 첫 장면을 보면 마치 코미디 같이 보이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코미디이지 않은가? 세상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방법 자체가 코미디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왜 이런 풍자를 쓰고자 했을까? 우리는 조지 오웰이 어떤 작가인지 알게 된다면 그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지 오웰은 버마 식민지국의 경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