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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Apr 24. 2023

실직에 대처하는 우리 모두들의 자세 - 6부

6부. 언제나 그때와 같이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난 상당히 운이 좋았다. 상경계열 전공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관리 업무를 수행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보통 대기업에서 이공계열 전공이 아니라면 영업직군부터 업무를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최하부의 경험을 뛰어넘어 바로 경영관리 직군이라는 행운 아닌 행운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당연히 경영관리 직군의 입장에서 타 직군을 바라본다면 무언가 부족하고 회사에 기여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 나에게 그 행운은 어찌 보면 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 몸속에 암 덩어리처럼 조금씩 크게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군 전역 이후 회사에 입사함과 동시에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고, 첫째와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 영광도 얻었다. 당연히 회사 동료들을 초대하여 결혼식 피로연부터 시작하여, 짐뜰이, 돌잔치를 해 왔으니 가족들의 경조사는 회사와 늘 함께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휴가를 결정할 때도 아무 고민 없이 회사가 보유한 휴양소 중 한 곳이 피서를 즐기기 위한 곳이었다. 그리고 아무 고민 없이 집안뿐만 아니라 일가친척의 모든 생필품은 회사에서 만든 것들이며, 보험도 회사에서 운영하는 보험이었으니 내 삶에서 회사를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첫째의 연필조차 회사에서 기념품으로 나눠준 연필이었으니, 내 아이들조차 회사 마크만 바라보면 "아빠 회사다!"라고 소리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장인 - 장모님, 어머니 - 아버지, 일가친척 모두 나의 회사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숨 쉬는 것 빼고 모든 것이 회사와 함께 하였으니 우리의 모든 것은 회사에서 시작하여 회사로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잊혀간다. 첫 번째 테이블에서 담당자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짧게 이야기한다. 회사사정이 안 좋아졌으니 나가야 한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그동안 무심하지 않았는지 반성 아닌 반성을 하게 되었다. 분명 계열사의 구조조정이 있던 그 순간에도 난 외면했다. 계열사의 수많은 사람들이 구제받기 위해 정성 들여 작성한 이력서를 한눈에 훑어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캐비닛에 던져두기도 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연히 나는 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르는 번호 - 그러나 어딘지는 모를 회사가 속한 전화번호가 내 전화기에 울리기 시작한 그 순간. 그는 나를 만나자고 하였으며, 너무나 무심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첫 번째 테이블에서 난 바로 결정할 수 없었다. 마침 그날은 금요일이었으니 주말 동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달라고 했다. 마침 토요일이 내 생일이었으니, 가족들과 생일밥이라도 행복하게 먹고 싶다고 했다. 담당자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바로 결정하시란 것은 아닙니다. 월요일 아침까지만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담당자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난 가방을 싸들고 회사 밖을 나갔다. 마침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점심시간이 막 1시간이나 남았지만, 퇴근 시간은 무려 7시간이나 남았지만 회사에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심히 거리를 걸어가며 고민 아닌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내가 해야 될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정처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나머지 몇 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사러 편의점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설날을 하루 앞두고 통보를 받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나보다 더 불쌍하게 생일 당일날 통보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던 상중에 통보받기도 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떠나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회사의 사업이 어려워졌으니 떠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난 주말이 낀 날짜였다 보니 주말 간 고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되었다. 담배 한 갑을 사고,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지난 13년 간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기 시작했다.

첫 입사의 추억부터 시작하여, 와이프와의 첫 만남. 첫 진급에서부터 지금의 순간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기 시작했다. 작은 생필품을 구매할 때조차 난 회사 마크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였으니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이며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단지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은 내 삶의 모든 순간을 그대로 도려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사정하며 남아있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니 그 고민이 당연한 듯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전부였을 뿐이다. 그나마 난 맞벌이였으니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다 치더라도, 외벌이 가정의 상황은 그리 나아 보이질 않았다. 단지 한 순간의 선택과 한 순간의 선택받아짐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만두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지니 이 선택이 옳은 것인가? 혹은 잘못된 선택인가? 가치 판단의 순간마저 박탈당해 버렸던 것이다.

비단 나의 상황만이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떠난 그 사람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조금 더 버틴 사람들도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른다. 단지 그들의 선택은 아무것도 아닌 선택일지라도 그들이 속해있는 가정과 부모님, 자녀들의 영향은 너무나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 큰 파도가 어떻게 들이닥칠지 알지 못했다. 단지, 이해하기 싫은 선택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수많은 회사 중 선택하며 젊음을 바쳤던 그 회사가 이젠 나를 버리려 했다. 그리고 난 그 순간에 내가 하기 싫은 선택을 결정해야 했다. 단지 돌이키기 싫은 그 선택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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