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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May 05. 2023

실직에 대처하는 우리 모두들의 자세 - 8부

8부. 때론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들이 있더라.

대기발령이 선고된 순간. 나에게 "회사"와 "조직"이라는 안전장치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시간은 더 이상 흐르기 위한 존재가 아닌 족쇄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숨을 쉬되, 숨을 쉬어야 하는 이유마저도 보고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음 편하게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마시는 일상이 사치가 되었다. 마음 편하게 담배 한 대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삶 또한 나에겐 사치가 되었다. 단지, 내가 해야 할 임무는 책상도 없고 아무도 없는 그 외로운 공간에서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했다. 단 한순간도 딴짓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갔다.

그들은 나에게 멋진 제안을 했다. 내 책상은 화물 엘리베이터가 있는 그곳으로 옮겨질 거라 했다. 그곳은 관행적으로 쓰레기를 쌓아두면 청소 여사님들이 재활용과 일반 쓰레기를 분리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청소 여사님들이 잠시 의자나 박스를 깔아놓고 쉬시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공간에 내 책상이 옮겨진다고 했다. 당연히 보안 관계상 PC를 지급하되 인터넷을 연결할 수 없다고 했다. 그 PC로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사실 무슨 업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회사는 나에게 첫 번째 배려를 해 주었다. 내 입장이 많이 난처할 테니 혼자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래도 혼자 앉아있을 공간을 주기 위해 낡은 책상과 의자를 주었다. 당연히 캐비닛은 없으니 짐을 어디에 놔둬야 할지 난감하긴 했다.

인트라넷에 내 이름은 사라졌다. 조회를 하더라도 내 이름은 "퇴직한 임직원"이라 뜰뿐이다. 하지만 난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고 존재하고 있다. 그나마 회사에서 주어지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하루하루 견뎌 나가면 혹시라도 자리를 주어질 수 있다는 제안 아닌 제안을 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몇 명이 대기발령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들의 책상은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옮겨졌으며, 그들의 이야기 또한 들리지 않는 곳에서 수군댈 뿐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보고를 해야 한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단 1분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점심시간도 딱 1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책을 읽거나 딴짓을 할 수도 없다. 인터넷도 접속할 수 없는 무용지물 노트북으로 지뢰 찾기나 테트리스를 해서도 안된다. 그것도 근태위반이란다.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워드나 파워포인트 혹은 엑셀만을 활용하여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 외에 어떠한 업무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회사와 관련된 업무를 해야 한다 한다. 그러니 회사는 합리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인터넷에 떠다니는 내용 중 우리 회사에 관한 내용을 스크랩하여 보고하라고 했다. 그나마 일을 주어줘서 다행이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컴퓨터였지만 말이다.

우선 어떻게 인터넷을 접속해야 할지 고민을 해 보았다. 회사에는 보안 AP가 설치되어 있으니, 내 핸드폰으로 테더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인터넷을 하려면 노트북을 들고 근처의 카페로 이동해야 하지만, 그것도 근태위반이 되니 컴퓨터를 들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없었다. 분명 회사는 퇴근할 즈음 내가 지금까지 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할 것이다. 그러면 무언가 해야 하는데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마침 강 부장님의 소식을 들었다. 강 부장님도 테이블에 앉아 6개월의 퇴직위로금을 제안받았지만 도무지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했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을 했다 한다. 불과 작년까지 임원 후보군이었지만, 사람 좋은 강 부장은 허허 웃으며 임원 자리를 정중히 거절한 터였다. 자신은 아직 현업에서 업무를 뛰는 것이 더 행복하다 했다. 아직 후배들을 가르쳐야 하고 이끌어야 하는 게 자신의 임무 같다고 했다. 그 이야길 들은 대표이사 최 부사장은 너무 흡족해하며 강 부장에서 손수 소주를 따라주며 지금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훌륭한 구성원이 있다고 치겨새워줬다.

마침 우 파트장이 그의 팀에 발령이 되기 전이었다. 경쟁사에서 온 우 파트장은 강 부장보다 나이가 서너 살 위였으며 호탕하게 사람 좋은 웃음을 내비치던 사람이었다. 자신은 사람이 좋고, 후배들이 좋으며 일이 좋다고 했다. 당연히 자신은 일이 좋아 이전 회사에서 임원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실무 업무를 하고 싶어 이곳으로 이직을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은 팀장인 부장의 직급이 아닌 파트장인 차장 직급을 부여받는 게 맞다고 했다. 사람 좋게 웃으며 이야길 하니 강 부장처럼 물욕 없는 사람이 한 명 더 왔다고 하며 최 부사장은 더욱 호탕하게 웃었다.

우 파트장은 발령 난 첫날 웃으며 자신의 파트원들 앞에서 자기 자랑을 무려 2시간 동안 했고, 업무 지시를 200번 했다. 당연히 그 200번의 업무 지시는 일관성이 없었다. 그다음 날은 무려 2시간 반이나 자기 자랑을 했고, 업무 지시는 200번의 곱절이나 했던 거 같다. 그다음 날은 토요일이었음에도 단톡방과 메시저를 활용하여 파트원들에게 자기 자랑을 했다. 그러니 화가 난 파트원들은 팀장인 강 부장에게 우 파트장의 이야길 했다. 우 파트장의 이야기를 들은 강 부장은 따끔하게 훈계를 한다. 주말은 지켜줘야 하고, 일관된 업무지시를 하고, 때론 지켜볼 필요도 있다고 했다. 당연히 우 파트장은 웃으며 이야길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리더십이 없다 보니 그런 것을 놓친다 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인사담당을 찾아가 강 부장의 비리들을 이야기한다. 그 비리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인사 담당은 눈엣 가시인 강 부장이 사라지길 바랐다. 학자금을 부정수급 했고, 연말 정산도 과대 계상을 했다 했다. 퇴근 교통비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부정수급이니 회사의 모든 청구사항이 거짓이라 했다. 물론, 우 파트장이 입사하기 전의 일을 어찌 그리 자세하게 아는지 궁금해할 법도 한데, 인사 담당은 질문을 하지 않고 그 내용을 수리했다. 그리고 인사위원회를 열고, 그에게 소명기회를 물어보고 당연히 듣지도 -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 위원회를 열고, 기록하지도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 파트장의 내용 그대로 확인할 수 없으니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 판단되어 강 부장을 보직해임하고 대기발령에 처한다고 했다. 그 순간 우 파트장은 강 부장의 자리마저 직무대행이 되었으며, 파트원이 아닌 팀원들에게 자기 자랑을 무려 두 시간 반 이상이나 하게 되었다.

강 부장은 대기발령에 처해지자마자 자신의 책상이 화장실 앞으로 옮겨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과 의자. 노트북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신문이나 책을 볼 수 있는 여유도 주질 않았다. 단지 책상에 앉아 화장실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마침 인사 담당은 짓궂은 장난을 하고 싶었는지 그의 책상을 남자 화장실이 아닌 여자 화장실 앞으로 옮겨두었다. 그러니 그를 쳐다보던 여사우들은 애처로움뿐만 아니라 경멸의 눈빛을 던지곤 했다. 어쩌다 한 번 화장실의 변기가 막히게 되어 화장실의 오수가 넘쳐나게 되면 그는 그 오수물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밟아야만 했다. 당연히 그의 몸에 묻어나는 똥오줌 냄새를 피해 가며 사람들은 경멸의 눈빛을 더욱 강렬하게 보여주곤 했다.

그는 하루하루 버티기 위해 매일 마음속의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루에 주어진 자유시간은 점심시간은 한 시간. 그 한 간동안 밥을 먹는 것도 사치였기 때문에 아침에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자 했다. 당연히 아무 일도 모르는 강 부장의 와이프는 짜증만 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셨으니 속이 부대껴서 해장국을 끌어달라는 게 아니냐 했다. 술좀 그만 마시고 일찍 좀 들어오라 했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들어간다. 강 부장이 등교할 아이들의 밥과 가방을 챙겨주라는 말을 남기며 다시 꿈나라로 들어간다. 강 부장은 허탈한 웃음을 내 비친다. 내가 며칠 전부터 화장실 앞에 책상을 옮기게 되었고 단 한 시간이라는 여유밖에 시간이 없다고 이야길 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있다가 아침 10시쯤 되어 강 부장의 와이프가 전화를 한다. 마침 홈쇼핑에 회사 계열사의 물건이 판매가 되니 임직원 할인으로 싸게 살 수 있도록 주문을 해 달라 했다. 자신 것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 것도 주문을 하게 10개쯤 주문을 하라 한다. 강 부장은 정중하게 직접 본인이 할 수 없겠냐며 이야길 했고, 강 부장의 와이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잔소리를 다 한다. 누구 남편은 벌써 임원이고, 누구는 와이프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처갓집 식구들것까지 한 보따리 준비해 두는데, 당신은 뭐가 잘나서 이런 것도 내가 전화해야 간신히 이야기해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냐고 이야길 한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강 부장의 와이프는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있는 한을 다 쏟아내며 이야길 한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당신과 20년간 산 나는 뭐가 되냐부터 시작하며, 내가 무시당하며 살아야 하냐고 이야길 한다.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며 강 부장의 와이프의 통화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나지막이 이야길 한다. 알았으니 이따가 이야길 하자 했지만 강 부장의 와이프는 그러고 나서도 무려 10분이 더 넘는 이야기를 하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끊어!"라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러고 나서도 무려 10분이 지난 뒤 폭언이 뒤 섞인 문자가 수십 통이 온 뒤에 그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강 부장은 한 숨을 쉰다. 자신이 통화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경멸하던 여사우들은 화장실로 그리고 사무실로 사라지고 있었으니, 그 뒤 5분 뒤 문자 메시지로 인사 담당의 경고가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허탈한 웃음을 띨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단 20분도 안 되는 시간. 자신은 근무 태만을 하게 되었고, 지시된 업무 외의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대기 발령의 순간에는 지시 된 행동 외 그 이상의 행동을 해서는 안되었다. 아무리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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